赤黛

[적먹] 한 컷

문(Mon) 2015. 8. 2. 21:26



너를 한 컷에 담는 게 이리 어려울 줄 몰랐다.


왜 그럴까 카메라 후면에 달린 화면으로 보고 또 봐도 알 수 없었다. 너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고, 나는 그런 너를 한 컷으로 담아낸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뜨거운 조명 아래 새하얀 벽에 기댄 너를 본능적으로 찍어댔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졌는데 익숙한 너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포즈를 취했다. 빛에 반사된 피부가 반짝이고 있었다. 훤히 드러난 상체를 보며 나는 너에게 말했다. 바지도 벗을래? 그러자 네가 웃었다. 태초의 모습을 전시하는 게 아닐 텐데. 그 말이 맞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손짓했다. 너는 다시 한 번 웃으며 버클을 풀었다.


자연스럽다는 건 어떤 기준일까? 나는 태어날 때부터 너를 찍기 위해 살았던 걸까? 그것은 아니었다. 내 꿈은 그럴싸한 학교에 들어가 나름 이름 있는 직장을 다니며 취미를 즐기고 것이었다. 그것은 고등학교 졸업하면서도 변함없었다. 아니, 변함없을 줄 알았다. 농구부를 나오고 졸업 전까지 너와 대화하지 않는 나는 전보다 무미건조하게 수업을 듣고 풍족한 취미 생활을 했다. 그런데 문득 하교 길을 걷다 본 적 없는 간판을 보았다. 새하얀 건물에 걸린 간판은 뜻 모를 이름의 갤러리라 적혀 있었다. 전면 유리에 보이는 액자를 가까이 보자 나는 이상하게도 네가 떠올랐다.


홀린 듯 들어간 안은 건물 벽처럼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나무 물결의 액자와 함께 걸려 있지 않았다면, 나는 사진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여성과 눈을 마주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나를 힐끔 바라 볼 뿐 머리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기이한 곳이다. 미로처럼 뻗은 통로 사이사이로 걸어간 내가 본 사진들은 전부 너를 떠올리게 했다. 꽃도, 나무도, 하늘도, 호수도, 심지어 도시까지. 왜 그런 걸까? 특정 주제가 없는, 심지어 포커스조차 나가버려 흐릿한 사진 앞에서 나는 너를 상상하고 끌어안았다.


돌고 돌아 마지막에 다다른 나는 새빨간 동백꽃 한 송이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이 벅찬 가슴을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힌 것처럼 폐에 가득 찬 이산화탄소를 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딸랑거리는 유리문을 열고나올 때야 나는 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 교문을 지나 체육관을 향하던 시선이 간질간질한 감정인 걸 깨달았다. 나는 너를 어떻게든 담고 싶구나. 그럼에도 나는 너에게 다시 다가갈 기회를 만들지 않을 예상을 했다. 그리고 내 스스로 내린 예상은 미래에 닿아서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벚꽃이 채 피기 전 강당에 나온 나는 부모와 함께 사진을 찍고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졸업장이 든 통을 든 채 저 멀리 보이는 너를 나는 눈으로 담아내기 벅찼다. 새로 바꾼 휴대폰을 들어 화면에 보이는 너를 찍어낸 순간, 어디선가 봄 내음이 느껴졌다.


카메라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네가 가르쳤던 특별 훈련의 연장선으로 느꼈기 때문일까 싶었다. 사람만이 그런 줄 알았던 관찰은 동물과 식물, 그리고 풍경에도 필요했다. 어떻게 바람이 부냐에 따라 내가 원하는 한 컷을 담아내는 것은 때때로 힘들고 지쳤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너를 생각했다. 이제는 휴대폰에 지워진 너의 전화번호를 기억하며 찍고 또 찍었다. 너를 닮은 신호등, 너를 닮은 동백꽃, 너를 닮은 노을, 그리고 너.


그것은 우연찮게 일어난 일이었다. 땡볕 아래 꽃 피우듯 아지랑이가 올라오던 시커먼 도로를 보고 있을 때였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횡단보도에 초점을 맞춘 나는 신호등이 파랗게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은 유난히 블록도로 뒤에 보이는 빌딩과 함께 찍고 싶었다. 어떻게 찍을까 고민하던 나는 신호가 바뀌는 순간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나는 카메라에서 시선을 뗐다. 저 멀리서 네가 걸어오고 있었다. 운명? 아니, 이것은 카메라를 잡기까지의 내 노력이었다. 기회였다. 나는 너를 불렀다. 아카시! 부르고 나니 후회했다. 나를 다시 만나기 전의 너를 담고 싶었는데.


대학을 다니던 중이라 했다. 과는? 경영학과입니다. 농구부 때 나이와 상관없이 말하던 날선 말투는 사라졌다. 묘하게 아쉬웠다. 나는 창틀에 앉아 시원한 커피가 담긴 유리잔을 보았다.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을 보니 어느 새 카메라를 잡았다. 배경으로 네 손이 찍혔다. 저는 마유즈미 선배가 사진작가가 될 줄 몰랐습니다. 나도 내가 신기해. 렌즈 줌을 맞췄다. 흐릿했던 네가 렌즈 너머에 보였다. 나는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결혼해? 네 손을 가리키며 묻자 웃음기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뇨. 너는 왼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만졌다. 사귀는 중입니다. 그렇구나. 갑자기 지진이 일어난 줄 알았다. 나도 모르게 테이블을 잡고 밑으로 들어갈 뻔 했다. 무엇을 찍고 있었냐는 말에 말없이 도로를 가리켰다. 여름의 도시. 나름대로 그럴싸한 주제를 말하자 너는 납득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참지 못하고 카메라를 돌려 디지털 화면을 보여주었다. 네가 찍혔어. 그러자 네가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횡단보도를 걷는 너는 꽤나 멋지게 찍혔는데 돌아오는 말은 조금 달랐다. 선배를 방해한 모양이군요. 아니, 아니야. 재빠르게 부정했지만 너무 빨리 대답한 것 같아 머쓱해졌다. 왠지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나는 너와 꽤나 오랫동안 대화했다. 나는 사진에 대해, 너는 대학에 대해. 그리고 여자친구 이야기도 했다. 대학 들어가서 사귀기 시작한 여자아이는 작고 예뻤다. 귀엽네. 내 말에 네가 그러냐며 웃었다. 나중에 커플 사진 찍을 일 있으면 불러. 마음에도 없는 소리에 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심장이 지끈거렸다. 나는 가슴 위를 긁었다. 조금 긴 손톱이 피부 아래까지 파고 들 것 같았다. 몇 마디 더 나누고 나니 너는 가봐야겠다며 일어섰다. 나는 나름 부드럽게 대답하며 너를 보내려 했다. 하지만 딸랑 울리는 종소리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튀어나왔다.


있잖아, 주말에 시간 있어? 그러자 너는 왜 그러냐며 물었다. 모델이 필요해. 나는 바짝 말라가는 입을 벌렸다. 너였으면 좋겠어. 나는 있지도 않은 전시회를 언급하며 붙잡았다.


나름대로 대회에 나가면 상도 타고 제법 이름 있는 작가에게 칭찬 받았지만, 나는 너를 고스란히 담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것은 현실로 일어났다. 작은 스튜디오 안에 들어온 너를 볼 때부터 나는 이 시간부터 나의 존재를 모조리 부정했다. 그래야만 그나마 너를 찍을 수 있었다. 미친 소리 같지만 내 가치의 정점은 너이길 바랬다. 모든 것이 완벽해지기까지 그 한 조각은 너여만 했다. 하지만 아직도 흘러넘치고 정리할 수 없는 마음에서 잡으려고 하는 나는 어리석었다.


모니터 상에 보이는 사진을 하나하나 보는 너는 꽤나 진지했다. 나는 그걸 보지 못했다. 비어있는 스튜디오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밖을 보았다.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곧 장마철이라 했었지. 나는 문 옆에 세워진 우산을 발견했다. 그게 없어지길 바랬다. 그렇다면 너와 나만이 이 세상에 남겨진 것처럼 느껴질 텐데. 가만히 보고 있으니 셔터 소리가 들렸다. 놀란 마음에 고개를 돌리자 네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함부로 만져서 죄송해요, 왠지 찍고 싶었어요. 떨어트리지만 않으면 돼. 나는 일어서서 너에게 카메라를 받았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쭉 뻗은 나는 이상해보였다. 지우고 싶었지만 네 온기가 담겼을지 몰라 삭제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어때? 계속 모니터를 보는 너에게 물었다. 초조한 내 상태를 알았는지 잔잔한 어조로 네가 자신감을 넣어주었다. 좋은데요, 누드 빼고 올라가는 거죠? 마음에 들면 그것도 걸 거야. 그건 좀 그런데. 너는 옷을 마저 입고 밖을 보았다. 여기서 네가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당장 끌어안고 입을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세워진 우산을 빌려달라고 말했다. 나는 거절할 명목이 없었다.


결국 세차게 내리는 비 사이로 사라진 네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게 전부였다.


나는 이 사진을 들고 누군가에게 내민 채 묻고 싶었다.


잘 찍힌 사진 같아요? 내 감정이 들어있나요? 그렇다면 그 감정은 무엇인가요? 말하기엔 낯간지러운 연애소설 같은 건가요? 만약 사랑이라 말한다면 나는 외장하드에 있는 데이터까지 모조리 날려버릴 것이다. 그것이 찍히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옷을 전부 벗어던지고 시부야 거리를 뛸 것이다. 아, 이것도 취소.


하지만 변덕스런 나는 고민한 끝에 인물 사진 공모전 신청을 넣고 말았다. 물론 스튜디오에서 찍은 너의 누드 사진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네가 내 두 눈을 도려낼지도 모른다. 이런 농담한 것까지 보복하겠지. 나는 몰래 너를 다시 만난 카페 테이블 아래를 찍었다. 네 발만 찍힌 사진이었다. 아무도 몰라줄 그런 사진이 어째서 인물로 들어가는가? 공모전 신청 메일을 보내면서도 나는 어이없었다. 너는 어쩌고 싶은 거야? 네 감정이 비친 사진을 어떻게든 알리고 싶은 거야? 아카시가 알아주길 바란다고? 무의식적인 사고력인가? 정말 되도 않다, 나란 녀석은. 알아주길 원한다면 아카시의 얼굴이 보이는 사진을 신청해야지.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는데, 답은 나와 있었다.


알아주길 원하지만, 알아주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었다.


너를 만난 것은 수상식이 열린 강당에서 나올 때였다. 방송국으로 사용되는 이 건물에서 너는 아는 사람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냐. 나는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대며 작은 트로피와 액자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너는 트로피를 가리켰다. 상 타셨나요? 응, 연기상은 아니야. 축하드려요, 어떤 상인가요? 액자 뒷면을 보며 궁금해 하는 너에게 나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글쎄, 뭐 같아? 수수께끼도 아니고 그렇게 물으면 쟤가 더 묻기라도 해? 평소의 너라면 분명 넘어가겠지. 나는 그렇게 너를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너는 오늘따라 붙잡으며 물었다. 전시회는 잘되셨나요? …제법. 그런가요. 너에게 잡힌 팔이 뜨겁다. 나는 조금 물러섰다. 나 바쁜데. 문득 나는 네 손을 보았다. 약지 손가락은 텅 비어있었다. 순간 밑바닥에 깔려 있던 용기가 튀어나왔다. 널 찍었는데 상을 받았어. 어떤 사진이요? 나는 순순히 액자를 뒤집어 보여주었다. 너는 그 사진을 보고 한참 말이 없었다. 네 발과 함께 무릎에 올린 손에는 반지가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궁금했지만 액자를 받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잘 찍으셨네요. 그리고 너는 말했다. 그래서 정말 바쁜가요? 내 대답은 단 하나였다. 아니.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 * *


사진작가 마유즈미와 다시 만난 아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