赤黛

[적먹] 비밀

문(Mon) 2015. 9. 13. 23:59



두 사람에게 있어 비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확히 콕 짚어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카시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지만 마유즈미는 때때로 무언가 숨기는 일이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언제 구했는지 모를 피규어가 하나 늘었다던가, 책꽂이를 차지하던 책 장르가 바뀌었다는 정도였다. 마유즈미는 취미를 예고하면서 살 생각은 없었다. 아카시도 그 점을 이해했다. 그리하여 이리도 은밀한 과정은 비밀이라 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비밀은 무엇인가?

소파에 누워있던 마유즈미가 말하기를, 아카시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냐 했다.

"이중인격."

그렇다. 아카시는 승리를 눈앞에 두고 흔들리는 순간 또 하나의 인격을 부르게 되었다. 어떻게 불러야 할까? 부인격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아카시는 조심스레 언급한 호칭이 있었다. 동생이라고 했다. 마유즈미는 소년의 과거를 듣고 재미있어 했는데, 진지하게 말하는 아카시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에 메모할 정도였다. 물론, 불량한 태도는 오밤중에 즉각 처벌 받았지만 말이다. 더 말해봤자 시시콜콜한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겠다만. 형과 동생, 형제가 한 몸에 있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유즈미가 아카시의 손을 잡고 병원이나 연구실에 갈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아카시의 내면이 거짓일 수 있으며 혹은 연기를 하는 것이라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카시는 말했다.

"그걸 일깨워준 것은 마유즈미 선배였습니다."
"내가?"
"네, 몰랐습니까?"
"태도가 바뀐 것은 알았는데."

어떻게 보면 어마어마한 비밀이고 잘못하면 두 남자의 관계가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계기였다. 아카시와 몇 마디 나눈 마유즈미는 잠시동안 고민에 빠졌다. 고교 3학년 당시, 1년 동안 함께 한 쪽은 동생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은 굳이 따지면 형이라는 것이다. 대인 관계에 있어 무시무시한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는 지금, 마유즈미는 태평스레 대답했다.

"딱히 상관없잖아."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인가? 그건 또 아니다. 왜냐하면 새근새근 잘도 자는 새벽 중에 마유즈미는 일어나고 말았다. 처음에는 지진인가 싶었다. 지진이 제 몸을 붙들고 흔들거나 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눈을 뜨고 나니 흐릿한 빛과 함께 어둑한 방이 보였다. 그리고 아카시와 마주했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무슨 일인지, 왜 깨웠는지, 악몽이라도 꿨는지 물으려고 했는데 입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유즈미는 한참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네가 동생이구나."

간단했다. 잊혀진 시간을 되돌려 직시하면 길이 보였다. 분위기, 몸짓, 표정, 그리고 시선. 익숙한 태도에 금세 알아차렸다. 마유즈미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남자지만, 졸업 전에 배웠던 관찰을 지금도 잘 활용하고 있었다. 부르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동생이라, 그렇게 불러야 할 상대는 아닌데. 낮의 대화 때문인가. 올곧게-그리고 불만스럽게-바라보는 눈길에 금방이라도 목이 조일 것 같았다. 그럴리가 없지만, 만약에 이 자리에서 숨통이 끊긴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소설의 한 장면처럼 눈앞이 프리즘처럼 빛나고 노이즈가 섞이게 되겠지. 아니, 조금 나쁜데. 아카시가 동인지를 다 처분해줄 것도 아니고. 분명 죽었다며 그대로 방을 보존할 녀석이다. 상대를 잘못 짚었다.

"아카시."

사과하듯 익숙한 성을 부르자 아카시가 속삭였다.

"치히로."

부드럽게 굴러가는 혀 끝에서 제 이름이 들렸다. 그리고 웃었다, 제법 예쁘게.

아카시는 안에 있을 때도 종종 깨어있다고 설명했다. 서로 쉽게 바뀌냐는 말에 의문이 돌아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물음표 달린 말을 질문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마유즈미는 평소처럼 흘려 보냈고, 아카시는 그 태도에 익숙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어제 만난 친구와 같았다. 이상하기도 하지. 고백한 쪽은 형이었고, 미묘한 기류에 우왕좌왕하던 마유즈미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남자와 사귀는 것을 생각해본 적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아카시는 괜찮았다. 디지털 문화를 접했기 때문에 무뎌진 걸까? 깊이 고민하진 않았다. 사귀다가 맞지 않으면 헤어지고, 좋으면 다시 만나면 된다. 마유즈미는 자신을 아꼈지만, 그보다 더 무모하기도 했다. 호기심을 불어일으킨 모험의 시작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학 졸업식 때도 아카시는 찾아왔으며, 시간을 훌쩍 넘기자 어느 덧 동거까지 하게 되었다. 어째서 여기까지 왔더라. 헤어질 구실을 찾지 못한 게 첫 번째였다. 그리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 이유는 좋아서였다. 단순했다. 좋아서, 네가 좋으니까, 헤어질 구실도 없는 거겠지. 때때로 서로에게 실망하고 싸우고 토라져도 결국 서로가 보이는 자리로 돌아왔다. 한 걸음과 한 걸음, 건물과 건물, 거리 끝과 거리 끝, 그리고 침대 한 뼘.

지금 두 사람의 거리다.

"용기 있네."

마유즈미의 말에 아카시가 부드럽게 말했다.

"치히로 덕분이야."
"나를 믿기 때문에 비밀을 말한 거야?"
"아니."

아카시는 말했다.

"치히로가 도망갈 기회를 산산조각낸 거야."

그렇게 말하며 축복하는 키스는 천사보다 악마에 가까웠다.

형보단 동생 쪽이 더 파괴적이고 로맨틱하다. 마유즈미의 간단명료한 감상평이었다. 그렇다 해서 아카시를 둘로 나눠 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하면 귀찮고, 번거롭고, 착각하면 불씨만 더 번지겠지. 사실 싸움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혹시라도 그런 게 있잖아. 얘는 손 잡는 걸 좋아하는데, 얘는 깍지 끼는 걸 좋아하면 어떡해? 이런 시덥잖은 고민을 사서 하고 있으니 아카시가 말했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지."

마유즈미가 말을 가로채자 아카시의 눈꼬리가 휘었다. 오늘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떴는데, 방 안에는 초승달이 떴다. 날붙이처럼 번뜩이는 날카로움에 엄지로 꾹 눌렀다.

"도둑고양이 같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간직하고 있던 대사를 외치자 아카시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울었다.

"야옹."

비밀이라 하는 것을 구태여 정의할 수 없었다. 너와 나, 아카시와 마유즈미, 두 사람 사이에서 그 단어를 언급하는 것은 쓸 데없는 짓이다. 마유즈미가 살인이라도 저지르지 않은 이상 비밀은 더 없지 않을까.

"그러니까 결국 상관없는 거 아닌가."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선배 뿐입니다."
"그런가."

네 친구들도 인정했잖아? 젓가락으로 겨냥하니 반찬을 집으려던 아카시가 물었다.

"그들은 계속 탐구하고 의심했죠. 어떤 모습이든 나라고 소개했지만,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끝까지 들어보면 결국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상기하고 만다. 히로인-은 아니지만-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남자 주인공 같은 위치 말이다.

"나는 조연이라 생각했건만."

머릿속에서만 담고 있던 말을 불쑥 내뱉었다. 무슨 소리냐며 물어볼 법도 한데 아카시는 그 말을 흘러 보내지 않고 그대로 물었다.

"그건 제 사전에 용납할 수 없어요."
"이렇게 빌어도?"
"네."
"...어련하시겠어."

마유즈미는 툴툴대며 밥그릇을 비웠다.

지금 와서 말하지만, 비밀이란 것은 하나쯤 만들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유즈미는 비밀이 생기는 순간 영원히 봉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먼지 하나라도 날리는 순간 아카시가 놓치지 않고 잡을 테고, 그렇다면 결국 들통날 게 뻔하지 않겠는가. 반대로 아카시가 숨긴다면? 글쎄, 그건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음에 말이야."
"네."
"비밀이 생기면 알려줄 거야?"
"어떻길 바래요?"

턱을 만지며 고민하던 마유즈미가 말했다.

"판단은 네가."
"제가요?"

아카시가 놀라자 그가 덧붙여 다시 말했다.

"응. 너희 둘 다."

이 정도의 말장난은 해도 괜찮지 않을까? 적어도 농담은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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