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먹] 패배
패배라는 단어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인생에서 가장 먼 우주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와 같았다.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걷던 아카시는 누가 봐도 낯선 단어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인격이 바뀌면서도 패배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패배라니. 넓은 경기장에서 모두에게 보여준 모습은 정말 비참했을 것이다. 그 때는 순순히 인정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어둠에 침식당하고 있었다.
아.
아카시는 이질적인 추위에 몸을 떨며 일어섰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홀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았다. 벽도 없는 이 세계에서 아카시는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온몸에 알레르기가 올라오는 것처럼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구부린 등이 펴질 줄 몰랐다. 그대로 몸을 웅크리자 미미한 체온이 뭉쳐 난로처럼 따뜻해졌다. 아카시는 다시 눈을 감았다.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야만 할까? 이곳에 있다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제 아비에게서 듣는 잔소리도, 하늘로 떠나보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도, 패배를 다시 맛보지도 않을 것이다. 별도 달도 없는 하늘을 보던 아카시는 눈을 깜박였다. 누군가 있는 것 같다. 있을 리가 없잖아. 다른 인격도 잠든 이곳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들어오지 말아야 했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공간에 찾아올 손님이 있단 말인가? 아카시는 지평선도 없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사람이다. 인지하기 무섭게, 아카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도망쳤어.”
“그 때도 지금도 도망칠 수밖에 없어.”
“현실을 인정할 수 없던 거야.”
“모두가 웃고 있어도 사실 뒤에서 비웃는다면.”
“더 이상 버텨낼 자신이 없어.”
넋두리였다. 아카시는 부인격에게도 하지 않은 말을 계속해 던지고 던졌다. 먹구름 낀 강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돌을 던지듯이 저 너머에 있는 상대에게 말했다. 속을 털어놓고 싶었다. 어차피 여기는 현실이 아니었다. 꿈에 가까운 장소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털어놔도 괜찮았다. 저 남자가 거리를 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한테 그런 말해도 괜찮은 거야?”
익숙한 목소리다. 남자의 말에 아카시가 고개를 들었다. 모습은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분명 그는 이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 때처럼. 남자는, 마유즈미는 아카시의 본모습을 잡아끌었다. 설령, 알고 한 행동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것은 구원과 비슷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무의식적으로 닿는 마음이 기적처럼 자신을 붙잡아주길 원했다.
“치히로잖아.”
낮게 들리는 목소리는 마치 피아노의 건반을 두들기는 음처럼 무거웠다. 마유즈미는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는 인도에 어렵사리 한 발짝 걸었다. 그러자 무(無)의 세계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길이 있었다. 끝에 서 있는 아카시가 보였다. 아카시는 이상하게도 두 사람으로 보였다. 실체인지 혹은 그림자인지 알 수 없는 두 빛무리가 일렁였다. 가늘게 뜨고 있던 눈 위로 아카시가 그려지고 새겨졌다. 마유즈미는 머뭇거리다가 걷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뜨자 이상할 정도로 생생한 꿈을 꾸고 있었다. 자각몽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꿈에서 아카시가 나올 줄 누가 알았는가? 그것도 도망치고 싶은 아카시와 마주하다니.
패배라는 단어는 마유즈미 치히로의 인생에서 가장 가까이 창문에 놓인 화분의 흙과 같았다. 승리하기에는 위로 오르지 못했던 지난 나날로 인해 마유즈미는 승부욕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달라야만 했다. 스스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마음을 편히 두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느 새 가까워진 거리에서 마유즈미는 손을 뻗었다. 한 손, 그리고 또 한 손.
“그러면.”
이리 와. 평소와 같은 눈이었다. 변함없는 목소리였다. 항상 보던 손이었다. 함께 했던 1년 간 일상에 녹아들듯 그림처럼 서 있는 그 모습이었다. 아카시는 마유즈미를 바라보았다. 마유즈미도 아카시를 보았다. 언제나 정점에 오른 소년은 기묘한 따스함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네가 말하는 건 하나도 모르겠는데.”
마유즈미는 말했다.
“어차피 너는 너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다르다고 말할 셈이야?”
아카시의 말에 마유즈미는 한 손을 뻗어 마주잡았다. 미지근하던 체온이 서로 맞붙자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다소 귀찮은 듯 보였으나 빤히 바라보는 아카시를 보고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살면서 모두가 승리하고 패배하기를 반복한다. 무너져 내린 것은 아카시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 치의 어긋나는 것이 없어야만 그것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나 어린 거야, 너는.”
이 말에 아카시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리다. 아주 어리다. 주변 사람들은 아카시를 보고 그저 어른스럽다고 말한다. 마유즈미도 그런 줄 알았다.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어른스런 모습은 몸에 밴 태도와 다름없었다. 사실은 다를 수 있다. 그래, 지금 생각하니 아카시는 참으로 달랐다.
“자.”
마유즈미는 남은 손을 내밀었다. 아카시의 시선이 닿았다.
“분명 이곳은 패배가 없겠지. 하지만 승리도 없어.”
도망간 장소는 고작 가로등 하나 켜있지 않은 어둠뿐이다. 나라면 라이트노벨에서 나오는 것처럼 좀 더 끈적끈적하고 질척이는 곳에 도달했을지 모른다. 마유즈미는 자기가 생각하고도 불쾌할 정도로 기분이 나빠져서 고개를 저었다. 책 읽는 걸로도 충분하다. 그런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조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와있고, 아카시와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 꿈일지도 모르는 허구였지만 마유즈미는 그래도 말했다. 어디에 있든 우월함을 뽐내던 아카시는 아무것도 없을 때야 나약한 자신을 드러냈다. 마유즈미는 비웃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진정성이 담긴 말을 뱉을 뿐이었다.
“어쩔 거야?”
“…선배는….”
아카시는 아까보다 한결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호칭조차 바꿔 부른 아카시는 부드러운 눈으로 마유즈미를 보았다.
“생각보다 말이 많으시네요.”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
마유즈미의 다른 손 위로 아카시의 체온이 느껴졌다. 아까보다 더 뜨거운 열은 마유즈미의 손을 잡아먹을 듯 꽈악 쥐었다. 아카시는 앞으로 걸었다. 갑작스레 다가온 모습에 마유즈미는 얼떨결에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돌리자 길은 끊겨있었다. 그러나 심해와 같은 바닥에는 희미한 빛이 공기방울이 되어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계속해 빛나고 있었다. 아카시는 한 발짝 더 걸어갔다. 물러서려던 마유즈미는 바닥이 닿지 않는 아찔함을 느꼈다. 그러나 추락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인 공간을 인지했음에도 마유즈미는 눈을 굴리며 바닥을 보았다. 그 때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마유즈미는 아카시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 말도 없던 아카시가 다시 불렀다.
“치히로.”
“…왜?”
두번째 부름에 대답하자 아카시는 수면 위로 아무런 파동이 느껴지지 않는 듯 고요하고 잔잔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제가 졌어요.”
그 때도, 지금도. 아카시의 말에 마유즈미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모든 걸 털어낸 듯 속시원해보이는 아카시를 보자 아무 말도 안했다. 그저 맞잡은 손을 의식할 뿐이었다. 확실한 것은 마유즈미가 모르는 사실이 지금 드러났다.
바로 아카시가 인정한 첫 패배(敗北)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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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먹_전력_60분
9. 패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