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먹] 밴드 <Rakuzan>
해가 지기 무섭게 길게 줄 서 있던 사람들이 지하로 내려갔다. 두 사람도 지나가기 힘든 통로를 지나 계단을 밟고 들어가니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 보였다. 지하치고 높은 천장과 함께 불빛이 반짝이는 스테이지를 보는 순간 사람들은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대 뒤 시멘트벽에 칠해진 그래피티는 눈에 띄는 색상으로 칠해져 있었다. 하늘색을 바탕으로 노란색과 초콜릿색, 검은색을 깔고 포인트로 빨간색이 두드러져 있었다.
Rakuzan. 그 단어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이대며 아무도 없는 빈 스테이지를 찍느라 바빴다.
그리고 스테이지 뒤, 공연 준비를 하는 세 멤버가 있었다. 민소매 티를 입고 자기 근육을 과시하는 남자는 드럼 스틱을 돌리고 있었고, 바로 옆에 앉은 또 다른 남자는 늘씬한 다리를 뽐내며 손끝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다. 거기에 무릎까지 덮는 반바지의 남자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무대 쪽에 고개를 내밀다 흥분한 기세로 달려왔다.
“저번보다 훨씬 많은데? 진짜 끝내준다!”
“당연하지. 사람이 없다는 게 말도 안 되잖아.”
매니큐어를 바른 남자-미부치는 새침한 목소리로 말하며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세이쨩은? 모르겠는데. 그러자 눈이 날카로워지면서 의심쩍다는 듯 말했다. 마유즈미씨도 없잖아? 응? …뭐, 어쩔 수 없지. 미부치는 다소 여성스런 말투로 서운함을 표하며 허공에서 드럼 연습을 하던 네부야를 불렀다. 먼저 올라가 있자고. 곧 공연 시작이야. 오우! 끝나고 푸짐한 덮밥 먹고 싶은데. 그건 이따 세이쨩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에이쨩은 만날 덮밥 타령이더라. …꺼어억. 으악! 더러워!
세 멤버가 스테이지에 올라가고 있을 때, 입구에서 누군가 벽에 기대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사람이 있는 줄 모르는지 그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스쳐지나갔다. 남자는 손목시계와 거리를 번갈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얘는 또 언제 오는 거야? 툴툴대던 그는 저 멀리서 복잡한 도로에 서는 자동차를 보았다. 야, 설마. 딱 봐도 비싼 차가 멈춰 서자 걷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몇몇 여성이 비명을 질렀다. 꺄! 아카시! 아카시군, 오늘도 도로 막혔어요? 오빠, 멋져요! 머리를 엉성하게 넘긴 채 나타난 아카시는 소리 지르는 여성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인파를 헤치고 걸어왔다. 그리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남자에게 다가갔다.
“기다렸어, 치히로?”
“…말 걸지 말고 그냥 들어가지.”
마유즈미는 순식간에 자기에게 꽂히는 시선에 고개를 저었다. 너는 너무 존재감이 크다고. 그는 아카시의 손을 잡으며 건물 뒤쪽으로 빠졌다. 쫓아오려는 여성들은 아카시의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어두운 골목길로 빙 돌아가 뒷문 앞에 서니 아카시가 말했다.
“다른 애들은?”
“먼저 올라가 있을걸. 아까 바닥이 쩌렁쩌렁 울리는 걸 보니 하야마가 마이크를 잡은 모양이야.”
“모두 일찍 왔네.”
“네가 늦게 온 거야. 차는 왜 타고 오는 거야? 여기 도로가 얼마나 막히는지 알고 있으면서.”
“그래야 치히로가 기다려주니까.”
빙그레 웃는 아카시를 보자 마유즈미는 질색하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짧은 복도 앞에 대기실이 보였다. 빨리 들어 와. 그는 아카시를 먼저 밀어 넣고 따라 들어갔다. 하지만 닫히기 무섭게 마유즈미는 문에 등을 기댔다. 아니, 기댄 게 아니라 아카시에게 밀렸다. 또야, 또.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무시하려 했지만 턱이 잡히자 어쩔 수 없이 앞을 보았다. …매 번 이런 식으로 하는 이유는? 치히로가 피해서. 자업자득이야. 아, 네. 그럼 오늘도 성공적인 공연을 위해. …이제 나랑 키스하지 않아도 성공적…읍.
세이쨩! 지각이야! 스테이지로 올라오는 아카시를 맞이한 미부치는 뒤따라오는 마유즈미를 보며 혀를 찼다. 어머, 마유즈미씨는 집도 가까우면서 왜 지각했어요? …나 욕먹은 거냐? 지금 누구 때문에? 마유즈미는 아카시를 가리키며 항의했지만 미부치는 듣는 척도 안하고 베이스기타를 쥐어주었다. 자요, 빨리 서요. …네, 네.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마유즈미는 제 위치에 섰다. 어차피 여기에 베이스가 있는지도 모를 텐데. 연습해봤자 알아주는 사람 있을까 싶고. 밴드에서 베이스가 빠질 수 없으니 어거지로 낀 기분이다. 아카시를 향해 전해드는 함성에 마유즈미는 가볍게 베이스를 튕겼다. 지잉. 그러자 하야마가 껑충 뛰어와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아카시한테 말 들었어? 뭘? 마유즈미씨가…. 말하려던 하야마는 마이크를 잡는 아카시를 보며 다시 제자리로 껑충 뛰어갔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저희 공연에 찾아와주신 관객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아카시 한 마디에 공연 3번 뛴 것 같은 효과가 보였다. 아카시는 짧은 인사를 마치고 조용히 스탠드에 마이크를 끼웠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순간, 드럼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반주가 시작되면서 아카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꽤나 얌전한 도련님이라 생각했는데. 마유즈미는 베이스를 튕기며 관객에게 호응 유도하는 보컬을 힐끔 보았다. 그 때는 목석같이 서 있기만 했지, 노래를 좀 부를 줄 알아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당장 쫓겨났을 거다. 마유즈미는 베이스를 둥둥 연주하다가 앗차 하는 표정으로 하야마를 노려보았다. 쟤 또 빨라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덩달아 네부야까지 신나서 치고 있다. 뒤에 서 있는 미부치의 시선이 느껴졌다. 네, 네, 가겠습니다. 마유즈미는 코드를 꽉 누르며 줄을 더 빨리 뜯어냈다.
아직 한 곡밖에 하지 않았는데도 관객은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스테이지에 달라붙어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보니 마유즈미는 고개를 저었다. 벌써부터 열기가 올라온다. 여기 에어컨은? 하긴, 틀어봤자 소용없지. 환기나 잘되면 다행이고. 스테이지를 제외한 어두운 바닥 위로 화려한 불빛들이 보였다. 야광 봉을 흔들며 반주에 맞춰 이름을 외치는 사람들은 각자 팬에 호응하기 바빴다. 라쿠잔! 라쿠잔! 아카시! 레오누님! 하야마! 네부야! 그리고 끝에서야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마유즈미는 여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베이스는 말 그대로 밴드에서 전체적인 음을 잡아주고 있었다. 그래서 되레 더 묻히는 경향이 있었다. 거기다가 마유즈미의 존재감도 한몫했다. 상관없어, 연주만 할 수 있으면. 마유즈미는 두 번째 곡으로 넘어갈 즘에 코드를 바꿔 잡았다.
곧 있으면 마지막 곡 할 때 아닌가? 관객들도 알고 있는지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지금이…그래, 마지막 전이군. 마유즈미는 쉬는 틈을 타 악기를 다시 조율하고 있었다.
“……이번 곡은…전반에….”
마유즈미는 좀 더 체력을 길러야겠다 생각했다.
“……야마와 마유즈미씨의 솔로 연주가 있겠습니다.”
……응? 마유즈미는 들은 적 없는 소리에 고개를 번뜩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꽂혀 있었다. 어, 어, 잠깐만. 그는 자기 위로 비추는 조명에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만! 난 한다고 들은 적 없어. 제법 시끌벅적한 관객에게 닿지 않는 목소리를 아카시가 잡아냈다.
“연습해오라 했잖아, 치히로.”
“…하기야 했지만….”
“잘하면 상도 줄게.”
…안 줬으면 하는데. 어쩐지 불안한 낌새가 느껴졌지만 아카시는 자기 멋대로 진행했다. 그럼 선두는 하야마. 그러자 하야마가 펄쩍 뛰며 일렉트릭 기타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각 잡는 동시에 빠르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현란한 손놀림은 당연 이 지역 기타리스트가 따라올 수 없는 재주였다. 징징거리며 특유의 전자음이 퍼져나가자 사람들이 소리질러댔다. 그는 마치 초원에서 표범이 뛰어다니는 것과 같았다. 먹잇감을 노리기 위해 긴장감을 조성하고, 달려들기까지의 한 박자, 거기에 고깃덩이를 얻기까지의 스릴감을 전부 담아냈다. 하야마를 울부짖으며 우는 애들도 있었다. 하, 난리도 아니네. 몇 분 지나지 않아 연주가 끝나자 함성과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럼 다음은.”
아카시의 손짓에 마유즈미는 처음으로 관객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 걸 느꼈다. 하아. 마유즈미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리를 살짝 벌리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조용히 줄을 튕겼다. 처음에는 꽤나 낯간지러운 음색이었다. 신이 나서 펄쩍 뛰던 아까의 노래와 달랐다. 하지만 갈수록 점점 빨라지는 손에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정확한 음색은 곧이어 귀를 맑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어 하야마 못지않은 손놀림과 더불어 악보 위에 음표가 톡톡 튀는 소리가 나자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마지막으로 끝마무리까지 말끔한 소리를 내자 마유즈미를 외치는 목소리가 커졌다.
“아.”
마유즈미는 어느새 마이크가 입 앞에 있는 걸 깨닫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다들 잘 모르는 것 같아 한 번쯤 이런 공연을 하고 싶었어. 이해해줄 거지, 치히로?”
“어, 그래.”
사람들은 이렇게 뛰어난 베이스가 있었냐며 놀라고 있었다. 응, 나도 놀랐어. 어제 삑사리 났었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좋아서 그런가. 마유즈미는 나름 흡족해하며 마지막 곡 하자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허리가 꺾이고 입이 막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던 관객들이 전부 증발한 것 같았다. 하지만 마유즈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아카시와 그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자기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잠깐, 잠깐만. 마유즈미는 얼른 입 떼라고 밀어내려 했지만 힘에 눌러 아카시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개미 기어가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입이 떼졌을 때, 넋 나간 마유즈미를 보며 아카시가 마이크를 대고 말했다.
“그리고 치히로는 내 거니까 탐내지 말고.”
“…오우.”
옆에서 보던 하야마를 시작으로 관객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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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좋은 질문 68. 밴드의 이름을 지어라!
...와는 매우 벗어난 주제였기 때문에 밴드ver 정도로 생각하면 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