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먹] 84




하얀 종이 비행기가 빙글빙글 돌다 떨어졌다. 끝 모서리가 구겨진 것을 본 아카시는 몸을 숙여 집어들었다. 위를 올려다보자 열린 창문에는 커튼만이 흔들리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던 아카시는 손에 든 종이 비행기를 살펴보았다. 스프링 노트를 찢었는지 동그랗게 구멍난 쪽이 일정한 크기로 찢어져 있었다. 흐릿하게 줄 그어진 부분을 눈으로 훑던 그는 부스럭거리며 종이를 펼쳤다. 세모 모양으로 선이 만들어진 종이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진 않았다. 아카시는 연필 자국이 남은 종이를 손으로 만지며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아카시는 반 접고 또 반 접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어디선가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를 떠났다.


마유즈미에게 말을 걸지 않은지 어느 덧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카시는 은퇴식 이후에도 선배를 보고 싶었지만, 완강하게 거절하는 그를 떠올리며 참기로 했다. 사실 그렇게 강하게 의사표현을 하지 않았다. 졸업 전까지 조용히 있고 싶어. 단 한 마디였지만 아카시는 마유즈미를 존중하기로 했다. 농구부 활동으로 지친 그를 위해 이 정도도 못해주겠는가?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고 아버지께도 한 소리 들었지만 아카시의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과 선배의 마음이 동일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만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언제부터 알아챘냐고 묻는다면 설명하기 어려웠다. 마유즈미의 고개는 언제나 자신을 향해 있었다. 죽은 것처럼 축 쳐진 눈동자 안에는 항상 그렇듯 제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걸 눈치 채고 고개를 돌릴 때면 그는 어느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주로 천장이나 골대, 농구공이었다. 시선 처리가 어색했지만 아카시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애써 눈길을 돌리려 노력하는 모습에 그저 속으로 웃기만 했다.


이 모든 일은 사소하게 넘어갔다. 로맨스 소설에 나올 법한 상황은 없었다. 신발장에 편지를 주고 받거나, 계속 눈이 마주쳐 웃는다던가, 혹은 우연히 식당 테이블에 같이 앉는다는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런 일을 만들라면 만들 수 있었다. 타이밍은 생각보다 맞추기 쉬웠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카시는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마음속으로 우연이 곧 운명처럼 바뀌길 원했을지 모른다. 불행히도-혹은 다행히도-그런 일은 없었다. 결승전이 끝나고 은퇴식을 보내기까지 둘의 대화는 1년동안 노트 한 페이지를 채우지 못할 정도로 짧았다.


그런데도 아카시는 마유즈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생각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말을 걸지 말라고 해놓고 먼저 무언을 던지는 쪽은 그였으니까.


종이를 펼쳐 손끝으로 더듬어봤다. 지워진 연필 자국을 하나하나 더듬고 나니 아카시는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あかし せいじゅうろう. 단 하나 적혀 있는 이름이야말로 마유즈미의 사랑이고 열정이었다. 그렇다고 종이 비행기를 접어 날리면 규칙에 어긋납니다. 아카시는 조용히 속삭이며 교복 주머니에 넣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온 거리는 겨울 날씨답게 으스스했다. 아카시는 가방을 고쳐 메고 나른하게 숨을 뱉었다. 순간적으로 얼어 퍼져나가는 입김을 보며 아카시는 건물 창문을 보았다. 그곳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친구와 닮았다. 존재감이 없고 독서가 취미인 남자다. 그렇기에 아카시는 마유즈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먼저.


내일도 당신은 저를 사랑할 건가요? 그에게 던질 질문이 떠올랐지만 곧 속으로 삼켰다.


왜냐하면 마유즈미는 내일도 모레도, 졸업까지 아카시를 사랑할 테니까. 아카시는 그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마유즈미의 입에서 나올 달콤쌉싸름한 고백을.



* * *


글쓰기 좋은 질문 84.내일도 당신은 저를 사랑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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