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먹] 승리



이것은 제 아비가 다져둔 길이다. 어릴 때 동화책 한 권조차 읽기 버거워했지만 아카시는 그 어떤 어른보다 더 빠르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앉아 한 글자라도 소리 내 읽는다면 모두가 박수치며 칭찬할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이 작고 어린 소년에게 걸으면서 한 문장을 읽길 원했다. 만약 책을 떨어트리고 반대쪽 길로 뛰어갔다면 더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든 그 나이 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아버지는 알고 있음에도 요구했다. 그래서 아카시는 한 문장이 아닌 두 문장을 읽으며 걷지 않고 뛰었다. 어린 나이에도 알았다. 만약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버려질 것이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렇게 살아왔다. 말로 적으면 참으로 단순하고도 힘든 과거였다. 유일하게 의지하던 어머니조차 사라져서 버틸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었다. 그 생각은 비틀어져서 또 하나의 인격을 만들어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부인격(副人格)은 갓난아이와 같았다. 어찌 보면 제 아비와 닮았다. 순수할 정도로 승리를 항해 맹목적으로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아카시는 안심했다. 작지만 자신이 지탱해야 할 배경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재였다. 편안히 눈을 감고 태아의 상태로 돌아갔다. 어둡지만 아득한 공간을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조차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제 겉모습을 보고 한 걸음 물러섰다. 모두가 속마음까지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족이고 동료이자 친구였지만 다가오지 않았다. 자신이 거리를 둔 탓이었다. 그러니 지금에서야 외롭다는 감정을 느낀다 한들 소용없었다. 바닥은 생각보다 따스한 동시에 차가웠다. 또 다른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박자조차 맞추지 않고 그대로 밖을 보지 않으려 했다.


이제 없어도 된다. 오히려 사라져도 누구 하나 몰라줄 세상이었다.


<그보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너 누구야?>


외로운 동시에 고독하다. 붙잡아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입 밖으로 나약한 말 한 번 뱉지 않았다. 그도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아카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되는 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카시는 눈을 떴다. 따스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미지근한 온도에 벅찬 마음을 느꼈다. 똑똑한 소년은 알았다. 마음은 전부 알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밀어내지도 거리를 두지도 않았다. 그저 너무나도 상냥한 탓이었다. 잔혹하기 그지없는 진실 앞에서 다들 입을 다물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가 아니다 해도 자신이 돌아올 수 있었을까?


아카시는 일어섰다. 웅성거리는 경기장은 얼마만인지 알 수 없었다. 오감은 제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몸이 가볍고 머리가 맑았다. 굳건히 서 있는 그와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들 모두 알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쓰러지려던 주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야 당연히.”


아카시는 웃었다.


“아카시 세이쥬로지.”


그래,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한들 지금의 사실이 거짓일 리 없었다. 이것이 진실이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던 간에, 그의 목소리로 돌아온 사실은 변함없었다.


마유즈미 치히로, 유일무이하게 밑바닥에 손을 뻗어준 남자.


윈터컵 우승을 차지할 수 없었다. 아카시는 알고 있었다. 부인격의 한계, 본래 존재할 수 없는 자가 이제까지 이 몸뚱이 하나 붙들고 버텨냈다. 원래 주인이 아닌 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아카시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두근두근 뛰는 하나의 심장은 여전히 굳건했다. 승리를 이뤄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부인격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마유즈미 선배.”


그는 졸업 전까지 말 걸지 말라고 선언했다. 1년 동안 함께 지내왔지만 말 섞는 행위에 불편해했다. 아카시는 선배의 의사를 존중하려 했다. 그러나 댐이 터진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의문과 감정에 멀어질 수 없었다. 항상 그래왔다. 마유즈미는 필요한 부 활동 외에는 모두와 만나려 하지 않았다. 간혹 가다 본 그의 모습은 항상 혼자 있었다. 책에서 떨어지지 않는 눈을 들여다볼 때면 종종 상상했다. 자신이 옆에 있다면 계속 책을 보고 있을 것인가.


“…또 너야?”


더 이상의 핀잔은 없었다. 마유즈미는 포기했는지 책을 살짝 덮고 시선을 옮겼다.


“그래, 네가 말을 정말 안 듣는 후배라는 건 알겠다.”


그는 알고 있을까? 함께 지냈던 그 시간동안 마유즈미는 생각보다 많은 말을 하곤 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마유즈미는 이야기 해보라는 듯 가만히 바라봐주었다.


“한 사람에게 두 사람이 있습니다.”

“…수수께끼야?”

“아뇨, 말 그대로입니다.”


이상할 정도로 긴장되기 시작했다. 아카시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서늘한 공기가 몸속으로 들어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사라지려 합니다.”

“왜?”

“이유는…상관없이요. 그렇다면 선배는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

“주관식? 넌센스?”

“편하게 대답하시면 됩니다.”

“흠.”

미간을 찌푸리던 그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떠다니는 푸른 하늘은 간간히 태양이 나와 햇살을 비췄다. 아카시는 난간 너머를 바라보았다. 하교하는 학생들의 소란스런 말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으니 마유즈미가 말했다.


“일단…잡지 않을까?”


두 눈을 떴을 때 그가 평온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네가 말하고 싶은 건 잘 모르겠는데…나 같으면 잡을 거야.”


마유즈미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어떻든 간에 함께 있었잖아.”

“…네, 맞아요.”


함께 있었다. 시작이 어떻든 간에 아카시는 또 다른 자신에게 모든 걸 미뤄두고 사라져 있었다. 승리 하나만으로 달리고 달렸던 부인격은 이제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려 했다. 아카시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마유즈미에게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단지 지금이여야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용하는 걸지도 몰랐다.


아니다. 아카시는 생각했다. 이것은 올바른 마음이었다.


“마유즈미 선배.”


마유즈미는 책을 피려다 말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때 느꼈다. 아카시와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소설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게 아니냐고 할 수 있었다. 조금 더 달랐다. 추위에 떠는 것과 다른 느낌이었다.


“좋아합니다.”

“…뜬금없는데.”

“이제야 마음을 전하고 싶었으니까요.”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감정의 경계선이었다. 그보다 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덩어리가 존재했다. 그것이 빛인지 혹은 그늘인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은 속이는 것이 아니었다. 아카시는 마유즈미를 좋아한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치히로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본심은 때때로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한다. 마유즈미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봐온 너는….”


그는 손가락을 빼내 책을 온전히 덮고 일어섰다. 눈높이가 올라간다. 동시에 하늘과 맞닿았다. 아카시는 이상하게도 마유즈미와 하늘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밝은 하늘 아래가 장소였기 때문일 수 있었다.


“이 정도로 포기하지 않겠지.”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모르는 그에게 아카시는 천천히 다가가 두 팔을 뻗었다. 마유즈미가 물러서려고 할 때, 소년은 그를 끌어안았다.


“저는 마유즈미 선배에게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

“뭐어…대답을 미룬다던가?”

“가능하면 짧게 부탁드립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생각할 시간을 줄래?”

“네.”


아카시는 그를 놓지 않으려는 듯 힘껏 끌어안았다. 위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길에 벗어난 적 없었다. 항상 말을 잘 듣는 아들이었다. 그러나 처음 승리를 놓친 것으로 아카시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저 하나의 길만 고집하던 그에게 걸어갈 수 있는 다른 장소가 생긴 것이다.


첫 걸음을 떼는 순간 아카시는 그 길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이것은 꼭 쟁취해 승리할 것이다. 또 하나의 아카시, 그리고 내 자신을 위해. 아카시는 선선한 바람과 같은 마유즈미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돌아온 대답은 불확실한데,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 * *


#적먹_전력_60분

7.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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