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먹] 앞으로도



두툼한 코트 하나 걸치고 나서는 길은 녹다 만 눈길이 펼쳐져 있었다. 거기다 군데군데 얼어붙어있어, 마유즈미는 교문 앞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수험 기간도 끝났으니 오랜만에 서점을 가려는데 이 험난한 거리를 걷다가는 적어도 한 번 넘어질 게 분명했다. 마유즈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지평선을 보았다. 인터넷을 통해 구매할 때도 있었지만 보통 신간은 내용을 확인해야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내키는 대로 이것저것 사다가 망한 적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제 아무리 가볍게 읽기 좋아한다 한들 책에 따라 공상세계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마유즈미는 그 끔찍한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공부하느라 필기한 노트도 새로 사야했다. 어쩔 수 없다. 마유즈미는 운동화 끈을 조인 뒤 교문 밖으로 힘차게 발을 내딛으려 했다.


“…선배?”


저 익숙한 목소리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눈 위를 밟았다고 믿었건만 바로 밑에 깔린 얼음과 마주하는 순간 마유즈미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버텨냈다. 넘어지지 않았다. 코트에 눈이 묻는 것은 사양이다. 햇빛에 제대로 말리지 않는다면 계속 구질구질한 냄새를 풍길 게 뻔했다. 마유즈미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코트에 목도리를 걸친 후배가 있었다.


“……너.”


입을 열던 마유즈미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 녀석과 있으면 다물던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길어지는 대화는 질색이다. 어떻게든 최대한 짧게 인사하고 끝낼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전에 내가 졸업 전까지 말을 걸지 말라고 했었는데 선배 말 무시 하냐?’


이상하게 시비 거는 것 같군. …차라리 더 세게 나가볼까?


‘네가 무슨 참견인데?’


그렇다면 왠지 1년 동안 본 그 눈과 마주볼 것 같다. 마유즈미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소설과 현실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던가. 이 귀염성 없는 후배는 선배의 고민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외출하세요?”

“…어.”


결국 마유즈미가 할 수 있는 것은 질문에 대답하는 것뿐이었다.


“서점 가세요?”

“어떻게 알았어?”

“어제 기숙사 들어가기 전에 책을 다 읽으신 것 같더라고요.”


확실히 어제 해가 지기 전 벤치에 앉아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몇 장 남지 않아 휙휙 넘기며 보고 있을 때 아카시가 스쳐 지나간 모양이다. 기숙사와 제법 먼 거리였는데 어떻게 봤는지 알 수 없다. 후배가 걸어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카시는 보도블록을 본 뒤에 사람 보기 좋은 미소를 보였다.


“같이 가실래요?”

“너도 서점 가?”

“문제집을 하나 살까 하고요.”


묘한 뉘앙스를 느꼈다. 하지만 마유즈미는 그걸 콕 짚어 들추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으로조차 말이다. 이상야릇한 기류에 흐르고 흘러 오해로 범벅되는 건 사양이었다. 마유즈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카시를 내려다보았다. 올곧은 시선과 마주했다. 벌써부터 피곤해진 선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마유즈미가 처음 발을 딛었던 자리를 제외하면 길은 순탄했다. 반쯤 걸어가자 녹아 사라져 딱딱한 바닥이 드러난 곳도 있었다. 마유즈미는 사거리에 도착하자 옆으로 돌아가 서점으로 들어갔다. 자동으로 열리는 유리문을 보며 발을 몇 번 털었다. 안은 제법 한산했다. 마유즈미는 느릿하게 걸어 익숙한 책장에 다가갔다. 신간 라이트노벨을 하나 둘 살펴보고 있으니 괜찮은 소재들이 보였다. 마유즈미는 그 자리에 서서 몇 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옆을 보자 아카시는 문제집을 신중하게 고르고 있었다.


“…으음.”


마유즈미는 대강 몇 권을 집어 옆구리에 끼고 다가갔다.


“너 올해 2학년 되잖아?”

“네.”

“그런데 문제집은 3학년 수준?”

“한 번은 봐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차분하지만 자신감 있는 목소리는 곧 졸업하는 예비 대학생의 마음을 짓밟았다. 마유즈미도 종종 예습을 하고 있지만 1년 앞당겨 공부하는 일은 드물었다. 자신의 흥미를 당기는 내용이 아닌 이상 지금 쥐고 있는 책 읽는 것도 때로는 벅찼다. 그런데 이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학생회장이란 존재는 어째 만화나 소설과 다를 바 없어보였다. 가장 성적이 뛰어나고 예의바르며, 절대적인 위치에 올라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학생을 세워둔다. 어떻게 보면 과장된 말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는 10년을 넘게 다니는 교육기관이었다. 그만큼 누군가 그 자리에 있냐에 따라 환경이 바뀐다. 마유즈미는 문제집을 고른 아카시를 보며 한숨을 말했다.


“이따 옆에도 들리자.”

“네.”


계산을 마친 마유즈미는 문구점에 들어가 펜이 진열된 자리로 갔다. 평소 쓰던 제품을 찾고 있으니 옆으로 불쑥 내미는 게 있었다.


“이거죠?”

“…너 나 스토킹 하냐?”

“전에 펜 빌려주신 적 있잖아요.”


언제 빌려줬었더라. 안 그래도 기숙사 들어가기 전 복도에 서 있는 아카시를 봤을 때였다. 다른 운동부들이 와서 작성을 요구하자 아카시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런데 찾으려는 게 없었는지 학생회장께서 직접 움직이려 했다. 그 때 지나가던 마유즈미가 품에서 펜을 꺼내주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돌려드리려 했는데, 찾을 때마다 보이지 않으셔서요.”


아마 졸업식 전까지 말 걸지 말란 후였는지 모른다. 최근 들어 시간 감각이 떨어지나 싶어 고민하고 있으니, 아카시는 내민 펜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에 쥐었다.


“이건 제가 살게요.”

“뭐? 됐어.”

“아뇨.”


계산대로 가는 아카시를 보며 마유즈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게를 나섰다.


어떻게 말해도 1년 동안 같이 부 활동하면서 계속 봐온 상대다. 기적의 세대, 라쿠잔 고교 학생회장, 그리고 농구부 주장까지. 어딜 가도 뒤에서 후광이 비칠 것 같은 사람을 계속 보고 있자니 마음이 울렁거린 게 틀림없다. 고인 물 위로 조약돌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농구부에 들어간 이유도 체력을 기르기 위함이었고, 배워가면서 즐거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만약 아카시가 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더 이상 농구부에 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드민턴이라도 했을까. 마유즈미는 계산하고 나온 아카시에게서 펜을 받았다. 아주 미미할 정도로 따뜻했다. 오랫동안 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이런 날씨라면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마유즈미는 전봇대에 들러붙은 채 녹지 않은 눈덩이를 바라보았다.


“이 길을 제대로 치우지 않는 모양이네요.”

“바쁜가보지.”


마유즈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학교에 건의하는 게 낫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카시는 천천히 걸으며 마유즈미를 쳐다보았다.


“곧 있으면 짐도 정리하셔야겠네요.”

“그렇지. 조만간 나가야 하니까.”

“아쉽네요.”

“뭐가?”


아카시는 망설이듯 입을 몇 번 움직이다 소리 내 말했다.


“이제야 선배와 길게 말할 수 있게 됐는데.”


맞는 말이다. 마유즈미는 대화를 싫어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치찬란하게 필담으로 나누고 싶지 않았다. 오고가면서 상대의 표정을 보고 기분에 따라 말의 방향성을 바꿔야 하는 게 이상할 치만큼 끔찍했다. 어릴 때부터 그래왔던 지라 부모님은 이래저래 걱정을 많이 했다. 말도 늦게 떼고, 애들이랑 제대로 놀지도 않는다. 항상 집에서 게임 아니면 책, 그것도 아니면 텔레비전을 볼 때가 많았다. 변변찮은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하고 혼자 철이 들고 나서는 공부를 시작했다.


농구부에 들면서도 사교성 하나 생각하지 않았다. 대인기피증까지는 아니니 협력해야 할 때는 확실히 할 수 있었다. 스포츠는 말이 아닌 몸으로 움직이는 대화였다. 그것은 나쁘지 않다. 자기 자신에게도 나름 승부욕이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처음 아카시와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거북했다. 어떤 말이든 대답이 돌아오길 원하는 그 시선을 멀리하고 싶었다. 거기다가 의도적이었는지 계속해 질문하고 묻는 녀석을 보면 주장만 아니었다면 발로 찼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네.”


그래도 대화를 편히 나눌 상대는 몇 되지 않는데, 곧 있으면 이별이다. 졸업하고 나면 마유즈미는 대학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을 것이다. 졸업한 모교를 제 발로 찾아가는 일은 극히 드물 게 분명했다. 항상 그랬다. 한 장소에 있다면 그곳을 나올 생각을 못했다. 농구부도 마찬가지였다. 1학년, 2학년, 그리고 3학년 때까지 붙들고 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걱정 말아요.”


차분히 걷던 후배가 말했다.


“전 계속 선배와 연락할 테니까.”


이것이 두려웠다.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물고 늘어지는 이 끈을 자신은 잘라낼 수 없었다. 이 잔잔하고도 요동치는 마음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마유즈미는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아카시를 계속 바라보게 됐을까.


도통 알 수 없는 소용돌이를 느꼈다. 현기증이 돈다. 스스럼없이 말한 아카시는 태평스러웠다.


“눈….”


아카시의 손바닥 위로 눈송이가 내렸다가 녹았다. 그 열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의 물방울로 변했다. 아카시는 손을 몇 번 쥐고 피면서 말했다.


“눈이 녹으면 뭐가 되는 줄 아세요?”


이게 무슨 쌩뚱맞은 소리인가? 마유즈미는 얼핏 들은 넌센스 퀴즈 같은 걸 생각했다.


“봄?”

“네?”

“…아니, 뭔데.”

“물이 되죠.”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아카시를 보니 기분이 나빠졌다. 얼굴을 찡그리고 있으니 아카시가 조곤조곤 봄바람처럼 속삭였다.


“물이 마르면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잖아요. 그리고 구름이 되어 비나 눈으로 다시 내리죠.”


아카시는 교문 앞에 서서 학교를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길부터 시작해 나무, 건물까지 전부 새하얗게 바뀌기 시작했다. 순백의 풍경은 자신이 모르는 세계로 끌어당길 것 같았다. 비와 다르게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을 보며 마유즈미가 말했다.


“나는 다음에도 너와 이렇게 지낼 자신이 없어.”

“선배는 그대로 있으면 돼요.”


아카시는 말했다.


“그러면 그 때처럼 먼저 다가갈게요.”


소년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자신감에 차 있었다.



* * *


졸업 전 아카시와 마유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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