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먹] 기억이 사라졌다 할지라도
※시그마님의 로그에서 이어집니다.
꽃을 받았다. 부 활동 선배의 병문안 꽃다발이었다.
“아카시, 자고 있지?”
“…….”
“잘 자. 내일 또 올게.”
수증기처럼 금세 사라진 목소리를 뒤쫓아보려 할 때,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소처럼 눈을 뜨고 있으니, 낯선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익숙해지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새하얀 병실을 둘러보던 아카시는 상체를 들었다. 무심코 코끝을 스치는 향에 시선을 돌리자 붉은 장미꽃이 보였다. 색 하나 잃지 않고 새빨간 꽃을 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메아리가 치는 것 같았다. 어둑해져가는 창문을 보았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대로 도망갈지 아니면 네 곁에 남아있을지.’
‘사실 어째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건 무슨 뜻일까? 어렴풋이 깨어난 정신 속에서 남자는 이유 모를 말만 뱉었다. 도망간다니? 어디로? 그런데 그게 왜 나와 관련된 것일까? 아카시는 푹신한 베개에 허리를 댔다. 옆에 놓인 가습기에서 분무되는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머리가 어질하다. 다시 눕는 게 좋을까? 아카시는 해가 진 뒤에 베개에 머리를 댔다.
마유즈미 치히로는 자신이 직접 찾은 환상의 식스맨 대용품이었다. 쿠로코 때처럼 패스 특화형 선수가 필요했기 때문에 아카시는 명단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만나게 된 사람은 쿠로코와 비슷하면서도 신체 스펙이 나쁘지 않은 선배였다. 그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며 자기 자신을 아낀다고 했다. 그런데도 제 설득에 나와서 받는 훈련을 보면 생각보다 성실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의외였다. 그것도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인 걸까? 다른 일정은 몰라도 훈련 때만큼은 꼬박꼬박 나왔다. 땀에 젖어 미끈거리는 손으로 농구공을 잡는 그를 볼 때마다 아카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쁘지 않네, 쓸모 있겠어.
그리고 나서…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상하다. 아카시는 머릿속 한 구석이 텅 비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가장 가까운 기억을 더듬었다. 결승전, 그리고 우승하지 못했다. 가슴 한 구석이 살짝 아팠지만 넘길만 했다. 아카시는 똑똑했으며, 자신이 쓰러진 순간부터 거꾸로 날짜를 세기 시작했다. 3일 정도 잠들어있었고, 몸 상태는 나쁘지 않다. 의사의 말을 듣자면 뺑소니였다고 하는데, 욱신거리는 것치고 무리가 올 정도로 아프지 않았다. 범인은 조만간 잡힐 거라고 이야기 들었지만 차에 부딪친 기억조차 없는 지금 그저 소설 한 구절 읽는 기분이었다. 그 전에는 어땠더라, 아카시는 다시 차근차근 머릿속을 더듬었다.
고용인의 말을 따르자면 약속이 있다 해서 나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만나기 위해 나갔던 것일까? 아카시는 그 날 따로 약속을 잡았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중학교 동창들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약속을 한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학생들? 아카시는 학생회장이자 농구부 주장이고, 어떻게 보면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지만 약속을 따로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자신의 약속을 한 사람은 누구냔 말이다.
“…치히로?”
멍하니 이름을 부른 아카시는 뒤늦게 놀랐다. 너무나 서슴없이 나온 이름은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혀끝에 남는 여운을 거둘 수 없었다. 부 활동 때 선배의 이름 한 번 제대로 부른 적이 없었다. 당신 혹은 너. 부 활동 때만큼은 유독 강압적인 아카시였다. 그런 주장을 보며 마유즈미는 혀를 찰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강도 높은 훈련에 더 집중할 뿐이었다.
“……치히로.”
기시감이 들었다. 자신은 이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른 적이 있다. 아니, 적어도 몇 십 번, 몇 천 번이나 불렀다. 그렇게 이름을 외칠 상대였는가? 그것은 아니었다. 마유즈미는 졸업 전까지 말을 걸지 말라고 했고, 아카시는 그것을 실천했다. 졸업식 날이 되자 선배들을 향한 메시지를 읊으면서 눈으로 마유즈미를 찾았었다. 그리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있으니 장미향이 짙어졌다. 자신이 장미를 좋아했던가? 아니다. 사실 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보통 병문안 때 꽃다발을 들고 오던가? 아카시는 다시 일어섰다.
휴대폰을 찾으니 배터리가 꺼져 있었다. 충전을 할 수 없다. 아카시는 이 답답함을 어떻게든 찾아내야 했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허하다. 그리고 체온이 그립다. 그립다고? 아카시는 묘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으로 읊었다. 꿈에서 들은 목소리와 제 목소리가 겹쳐졌다.
“오늘이…마지막일 수 있다….”
그래도 확실한 건.
“……네 기억이 돌아오기까지.”
결정을 내린다. 아카시는 제 눈가에 손을 얹혔다.
“내 기억.”
지금으로썬 문제가 없었다. 지금까지 지내온 일들을 전부 잊은 것은 아니었다. 제 아비의 얼굴부터 시작해 중학교 동창들, 그리고 현재 학우들까지 떠올릴 수 있었다. 흐릿하지만 어머니와 함께한 추억도 기억했다. 그런데도 어찌 이리 불안한 것인가? 단순히 ‘치히로’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마유즈미는 단순히 병실을 방문할 걸지도 모른다. 선배로써, 부 활동을 같이 한 후배를 위해.
…앞뒤가 맞지 않아, 아카시. 스스로에게 던진 의문에 아카시가 대답했다. 알아, 하지만…. 아카시는 달이 뜬 창문을 보며 숨을 깊게 내쉬었다.
“지금은 상대가 없어.”
당분간 병실을 나서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의사들도 안정을 더 취해야 한다고 했다. 아카시는 아까의 말을 떠올렸다. 내일도 온다고 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해가 뜬 뒤 병문안을 온 마유즈미를 기다리는 것이다.
마유즈미 치히로, 그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 * *
기억을 잃은 아카시와 망설이는 마유즈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