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먹] 이별과 미련




문을 밀었는데 가로막는 물체가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밀자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쓰러진 청년은 잠이 들었는지 숨소리만 들렸다. 어이. 가볍게 불러봤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취한 게 분명했다. 마유즈미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숙였다.


잠이 든 성인 남자를 업는 것은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부잣집 도련님이 여기서 잠이 들면 어쩌나. 마유즈미는 어깨에 떨군 머리의 정수리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언어(言語)는 대화해주는 상대가 있어야만 의미 있는 것, 그는 더 말하지 않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복도 끝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기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마유즈미는 축 늘어진 청년을 한 번 들썩이며 자세를 똑바로 잡았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갑작스런 소식이지만, 현재 아카시와 헤어진 지 2주가 지난날이었다. 왜 헤어졌냐고? 이유 없는 이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불안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궁금하다면, 못 말해줄 것 없지. 마유즈미는 어깨를 으쓱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가장 큰 이유는 미래를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카시는 이 관계가 영원토록 이어지길 바랐다. 나도 그러길 빌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못해 추락시켰다. 알고 있다. 아카시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도련님이고, 약혼자도 생길 것이고, 결혼해 아이를 낳아야 했다. 그 아이는 아카시 가(家)를 이끌어가는 후계자가 될 것이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그 자리에 내가 있을 수 있는가? 마유즈미는 고개를 저으며 가로등을 지나갔다. 걷고 나니 발가락이 시렸다. 아까 나올 때 슬리퍼를 신고 있었구나. 그는 부르르 떠는 아카시의 몸을 느끼며 받치고 있는 손으로 엉덩이를 두들겨주었다. 있을 수 없다. 아카시와 마유즈미는 남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성별로 같은 성과 사랑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불법이라 하기엔 애매했지만, 적어도 가족이 용서치 않을 게 분명했다. 마유즈미는 구름 낀 깜깜한 밤하늘을 보며 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자 눈을 감은 아카시가 보였다. 입이 돌아가진 않았겠지. 얼굴을 꼼꼼히 살핀 마유즈미는 다시 걸었다.


아카시는 납득하지 못했다. 사귀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녀석은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고집이 셌다. 헤어지고 싶지 않고, 멀어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냐고 물으면서도, 내 말은 전혀 듣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말했다.


<너 때문이야>


만약 아카시가 자신과 비슷한 조건의 사람이었다면 지금처럼, 그보다 더 오래 있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눈을 속여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방법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매몰찬 발언에 힘을 주던 눈이 풀어졌다. 어미 잃은 짐승 하나가 마유즈미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카시 곁에 더 머물 수 없었다.


<안녕>


짧은 작별인사와 함께 마유즈미는 떠났다.


무겁잖아. 마유즈미는 이 겨울밤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대문이 보이자 후들후들 떨던 다리를 다시 폈다. 기둥에 달린 벨을 누르자 중년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마유즈미는 어렵지 않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저 멀리 발소리가 들렸다. 대문을 연 고용인은 마유즈미에게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별 말씀을. 그는 덤덤하게 답하며 업고 있는 청년을 내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발이 닿는 순간 눈꺼풀이 움직이면서 아카시가 깨어났다. 도련님. 고용인이 부르자 아카시는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시선에 마유즈미가 들어왔다. 그 순간, 마유즈미는 자신에게 붙는 아카시를 보고 짜증냈다.


“야, 떨어져.”

“도련님.”


알고 있다. 이것은 취중진담(醉中眞談). 아카시는 술을 빌미로 동정심을 유발했다.


“치히로….”


물기 젖은 목소리에 마유즈미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고용인에게 사과한 마유즈미는 대문 밖에 섰다. 비틀거리던 아카시는 곧 바르게 서서 올곧게 바라보았다. 돌아온 거야? 덧없는 물음에 언제나 같은 답을 돌려줬다. 아니. 마유즈미는 차가워진 제 얼굴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안녕이라고. 나름대로 헤어졌다는 표현을 쓴 건데 못 알아들었어? 이래서 도련님이란. TV에서 하는 드라마라도 봐라. 평소보다 날이 선 목소리에 아카시가 물었다.


“그럼 왜 온 거야?”

“너 취해서.”

“취하지 않았어.”

“그럼 아까 전부터 풍겨오는 술 냄새는 뭔데?”


그러자 아카시가 시치미를 뗐다. 착각이야. …어련하시겠어. 마유즈미는 대문을 가리켰다. 얼른 들어가. 술 마시고 또 오지 말고. 돌연 세상이 뒤집혔다고 믿었다. 밤하늘을 보고 있으니 순간 바닥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입술을 간질거리는 감촉에 그는 떨어지려 했다. 옷깃을 억세게 잡은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술 마신 사람이 이런 힘은 또 어디서 나온 것일까? 마유즈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감고 끌어안았다. 품에는 아카시가 있었다.


알콜향에 마유즈미마저 취할 것 같았다. 긴 키스가 끝나자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떨어졌다. 아카시는 그것마저도 핥으며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이래도? 잠긴 목소리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답했다. 응. 간결한 대답과 함께 떨어졌다. 따뜻했던 몸은 순식간에 식었다. 아카시는 얼굴을 찡그리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떻게든 제 앞에서 버텨내려는 옛 애인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안타깝냐고? 아니. 불쌍하냐고? 아니.


그저 사랑스러웠다.


이상과 현실, 그것은 공존할 수 없다. 영원히. 아카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은 머리와 다르게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유즈미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아카시는 이상을 품고 있을 뿐이다. 고용인이 나와 아카시를 데려가고, 대문이 닫히고 나서야 한 걸음 뗄 수 있었다. 담벼락 너머로 저택 불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우연을 가장해 또 스쳐 지나가겠지. 그 때의 아카시는 지금과 다르게 가면을 쓰고 있을 것이다. 오만하고 고고한 나의 영원한 주장. 그리고 나의 연인. 마유즈미는 잠든 저택을 바라보다가 쓸쓸히 몸을 돌렸다. 가로등을 스치고 나자 번뜩 떠오른 생각이 입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는 또 기회를 주겠지.”


오늘처럼.



* * *


헤어지지 못하는 아카시와 마유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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