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히 비치는 보름달 아래서 마유즈미가 깨어있다. 드문 일이었다. 그는 항상 누우면 아카시가 뭐라 떠들든 간에 깊은 잠에 빠지기 일쑤였다. 아카시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베개 옆에 구겨진 메모지가 있었다. 새근새근 아침잠에 빠진 아카시를 바라보며 읽으면 어제 이야기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어제는 이렇고 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간략하게 적혀 있는 문장을 하나 둘 짚어보고 나면 마유즈미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몇 시간동안 전해지지 않았던 내용을 그렇게 기억했다.
넓은 창을 통해 내리쬐는 달빛은 오묘한 분위기를 일으키곤 했다. 마유즈미는 유리 너머로 보이는 둥그런 테이블을 보았다. 그 위에 놓인 빈 화병과 재떨이가 보였다.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가을 냄새가 짙게 풍기는 밤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습습했다. 침대 옆 서랍을 열자 담배 하나가 놓여있었다. 몇 년 전부터 입에 달고 다니는 기호식품이었다. 아카시가 미간을 찌푸려도 끊지 못했다. 아무리 설득해도 사는 것을 멈추지 않자, 아카시는 대신 근사한 케이스 하나 선물해줬다. 철제 뚜껑에는 영문 모를 빙산이 그려져 있었다. 늙은이나 쓰게 생긴 디자인이었지만 마유즈미는 별 탈 없이 받아들었다. 종이로 된 담배 갑에서 빼내 다시 옮기는 게 불편했지만, 며칠 지나고 나자 금세 익숙해졌다. 때때로 아카시가 미리 옮겨 담아두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문을 닫고 푹신한 쿠션이 깔린 의자에 앉았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움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는 여전히 곤히 자는 제 연인이 보였다. 마유즈미는 털썩 앉아 담배를 물었다. 재떨이 옆에 놓인 플라스틱 라이터를 꺼내고 불을 붙었다. 새하얀 막대 끝에 불이 붙자 순식간에 새빨간 점이 생겨났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 있다. 누구나 살면서 그런 밤이 있을 것이다. 날씨와 상관없이 졸음이 쏟아지지 않을 때면 동화 속 요정을 한 번 떠올리곤 했다. 별 모양 지팡이를 들고 금색 가루를 뿌리고 다니는 요정 말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곳은 현실이다. 마유즈미는 필터를 잘근 깨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뿜는 연기는 탁한 색이었다.
마유즈미는 의사와 상담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불안감이 밀려올 때마다 그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일종의 정신병이라 생각하지만 살면서 그리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였다. 굳이 언급하자면 아카시가 난처해했다. 치히로, 피곤해보여. 잠을 제대로 못 잘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통에 마유즈미는 온갖 변명을 하기 일쑤였다. 대체로 그냥 혹은 갑자기 등의 부사를 언급했다. 이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시는 묻지 않았다. 제멋대로 구는 자신을 보며 아카시는 무슨 생각을 할까? 포기한 걸까?
언젠가 한 번 아카시의 아버지를 본 적이 있었다. 스쳐 지나간 우연의 찰나였다. 같이 하던 아카시가 잠시 일이 있다며 전화를 받을 때, 도로 옆에 세워진 검은 차가 있었다. 저 먼 곳을 바라보던 마유즈미는 지잉 소리를 내며 내려가는 차 창문을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카시와 비슷한 눈빛의 사내를 보았다. 아카시 마사오미. 그 누가 소개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카시는 이 나라에서 알아주는 명문가 후계자였지만, 아버지와의 의견 차로 인해 출가한 지 오래였다. 아니, 가출이라고 하는 게 좋을까? 적어도 이 사내는 아들의 짧은 방황에 잠시 손 놓고 지켜보고 있었다. 어차피 이곳을 가든 저곳을 가든 아카시는 돌아올 것이다. 마사오미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것은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고, 다시 아버지 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선택을 부추긴 것은 다름 아닌 볼품없이 보도에 서 있는 이 청년이었다. 마유즈미 치히로. 아무것도 없이 나온 아카시를 받아준 그였다.
별다른 말은 오고가지 않았다. 중년 하나가 건네는 봉투가 전부였다. 창문 밖으로 반쯤 내민 두툼한 봉투를 보고 있으니 마사오미가 입을 열었다.
“힘들겠군.”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그는 물건을 그대로 던졌다. 가슴께 부딪쳐 바닥에 떨어진 봉투가 열렸다. 고개를 내민 지폐 뭉치를 보고 있으니 엔진 소리가 크게 울렸다. 마유즈미는 휑한 도로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인질을 잡고 요구하는 납치범이 된 기분이었다. 손에 쥐고 있으니 꽤나 묵직했다. 돈은 필요 없었다. 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 자기 자신도 취미를 즐길 정도로 먹고 살 만 했다. 그런데도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던지지 못한 까닭은 이름 모를 녀석이 쓰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돈이었다. 봉투를 품에 넣고 나니 마음이 허했다.
어른의 여유였다. 어느 한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아들에게 반찬으로 고기 한 덩이 더 얹혀달라는 것처럼. 마유즈미를 위한 것이 아닌 아카시를 위한 것이었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참으로 끔찍했다. 잊을 만하면 만나는 그 자리가 싫었다. 그럴 때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불안감과 함께 이유 모를 배신감이 들었다.
아카시는 마유즈미를 좋아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대답을 했을 것이다. 한 순간의 떨림이자 방황이고, 놀이다. 그 나이 때 느낄 수 있는 감정, 마사오미는 마유즈미를 그리 표현했다. 돌풍. 아카시의 마음을 헤집고 도망갈 바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더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유즈미도 거기에 동의했다.
마유즈미는 아카시를 떠올렸다. 누구의 표현처럼 돌풍은 아니었다. 산들바람이었다. 기분 좋게 바람을 쐬고 있으면 잊을 듯 잊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고 또 머물렀다. 피부를 부드럽게 스치고 있자면 강렬한 욕망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온갖 욕구로 휩싸인 절대적인 선이자 악에 가까웠다. 그리고 한 차례 지나 바람이 사라지면 너무나 아쉬워 불지 않아도 떠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움이었다. 마유즈미는 그리움을 갖고 싶지 않았다. 그럴 바엔 그 전에 먼저 떠나길 빌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있던 마유즈미는 달칵 열리는 소리에 숨을 내쉬었다. 재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물고 있는 담배를 빼 재떨이에 비비고 나니 입을 열었다.
“내일 수업 있지 않았어?”
목소리가 대답했다.
“옆에 없어서 나왔어.”
눈을 뜨자 아카시가 앉아있었다. 담배 케이스를 열어 한 개비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안 피잖아.”
“치히로도 피는데, 한 번 펴볼까 하고.”
느릿한 말과 함께 담배 연기가 다시 피어올랐다. 입에 물고 뗀 담배를 보는 순간 마유즈미가 손을 뻗었다. 단단한 손목을 쥐고 당기자 담배 냄새가 코끝을 훅 찔렀다. 따뜻한 손길이 뺨과 턱에 닿았다. 뜨거운 숨 대신 연기가 입안을 감쌌다. 재가 묻은 입술을 털어내려 하자 그늘이 드리워졌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눈과 마주하자 마유즈미는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아카시.”
“응.”
“너는 담배 피지 마라.”
그렇게 담배를 가져가자 아카시가 물었다.
“왜?”
마유즈미는 평소처럼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건강에 안 좋잖아.”
“치히로 건강은 좋고?”
“나는 너보다 오래 살 거니까 괜찮아.”
그 말을 들은 아카시가 웃으면서도 열린 케이스를 덮었다. 마유즈미는 그 모습을 보며 나른하게 숨을 내쉬었다. 연기가 먹구름이 될 것처럼 하늘 높이 올라갔다. 밝은 달을 가리다 말고 사라지자 마유즈미는 다 삼키지 못한 말을 속에 뱉었다.
나에게 배운 것이 지나간 인연의 증거로 남기고 싶지 않으니.
* * *
#적먹_전력_60분
4.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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