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먹] 선물



“사고 싶은 거 있다 하지 않았어요?”


현관에 서 있던 남자의 말에 마유즈미의 미간이 구겨졌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무슨 소리야?”

“전에 말했었잖아요. 비싸서 못 사는 게 있다고.”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옥션 사이트를 뒤적이면서 욕한 적이 있는데, 그 날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마유즈미가 어떤 물건을 보고 못 얻었다고 분개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피규어인가? 아니면 때 지난 애니메이션 DVD? 그것도 아니면 뭐지? 전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아카시가 미미하게 웃었다.


“오늘 쉬는 날이니까 사고 싶었던 물건 찾아봐요.”


아카시는 지갑을 펼치더니 네모 모양의 얇은 플라스틱 하나를 내밀었다. 무심코 받아든 마유즈미는 그것을 앞뒤 살펴보더니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 이건 엔간한 상위권 재벌들도 손에 쥐지 못하는 것이었다. 바로 국내에서 몇몇 VVIP 고객만 받는 블랙카드였다. 금색처럼 반들반들 빛나는 카드를 쥐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조명에 반짝이는 것을 보고 있으니 마유즈미는 잠시 아찔했던 정신을 다잡았다.


“아카시.”

“네.”


신발을 신은 아카시는 눈앞에 들이댄 카드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


“필요 없으니까 가져가. 부담스러워.”

“다른 때는 잘 쓰셨잖아요.”

“그건 블랙카드가 아닌 전제 하에 열심히 쓴 거지.”

“다른 건 없어요.”

“많이 달라.”


하지만 아카시는 받는 대신 한 걸음 멀어져 현관문을 열었다. 가을바람이 선선히 부는 바깥 풍경을 보자 마유즈미는 제법 날이 쌀쌀한 걸 알았다. 야, 잠깐만. 마유즈미는 카드를 다시 쥐어주면서 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얇은 코트를 가지고 나오자 아카시는 순순히 소매에 팔을 넣었다. 걸치고 나자 아카시는 마유즈미를 향해 웃고 나섰다.


“다녀올게요.”

“그래.”


현관문이 닫히고 나자 마유즈미는 흔들던 손을 내렸다. 청소를 해야겠다며 몸을 돌리려던 찰나, 신발장에 놓인 카드를 보고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두고 갔다. 마유즈미는 찝찝한 표정으로 카드를 집어 들었다. 방으로 들어간 마유즈미는 책상에 올려놓은 뒤 한참 쳐다보았다.


“…쓰라고 했긴 했다만.”


마유즈미는 아카시처럼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제 취미 생활을 즐길 정도의 돈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은 함께 살면서 금전적인 부분에 대해 따로 건드리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다면 적당한 금액에서 사면 됐다. 아카시는 돈에 구애받지 않아 마유즈미 또한 부담 없이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이건 다르지. 마유즈미는 블랙카드를 보다가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정부(情婦)가 된 기분이군.”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둘이 살면서 성별로 인해 몇 번의 시련-거창한 표현을 써도 되는지-이 있었지만 현재로써 잘 지내고 있었다. 간혹 가다 아카시가 가져온 서류에 맞선 사진이 껴 있는 것을 빼면 말이다. 파일을 살펴본 뒤에는 질투보단 두려움이 컸다. 아카시를 믿고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세상은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며칠 전 미국 법정이 바뀌는 순간을 보았지만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미국으로 가고 싶냐는 아카시의 질문에 굳이 대답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고민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마유즈미는 노트북을 키며 자주 들어가는 옥션 사이트에 접속했다. 메인 화면부터 값비싼 물건 이미지가 뜨는 걸 보고 픽 웃었다.


“그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못 쓸 것도 없지. 마유즈미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 장바구니로 들어갔다.


유난히 내리쬐는 햇빛에 블라인드를 치고 나니 모니터 보기가 훨씬 더 수월해졌다. 아카시는 자리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아침에 카드를 준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른 신용카드를 줄 걸 그랬나? 하지만 지갑을 열어 맨 처음 보였던 것이고, 아카시도 별 생각 없이 내밀긴 했다. 전국에 몇 없는 카드이니 조심해야 하는 이유도 알지만, 별개로 마유즈미가 거절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른 때라면 서슴없이 받았을 법도 한데. 맞선 때문일까? 아카시는 아버지의 비서를 통해 종종 사진을 받지만 단 한 번도 약속을 잡은 적이 없었다. 그건 마유즈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을 때만큼 불안감에 가까워졌다. 둘은 대화가 많지 않았다. 믿음이 있으니까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때때로 속마음을 말 한 마디라도 주고받고 싶었다.


깊은 고민에 빠지던 아카시는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카드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몇 번 손에서 울리던 휴대폰의 통화버튼을 누르자 낯선 안내원 목소리가 들렸다.


<반갑습니다, 아카시 세이쥬로님. 방금 전 카드 내역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확인돼 전화 드렸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아카시는 뒤늦게 깨달았다. VVIP 고객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만큼 특정 지역이 아닌 곳에서 사용하게 되면 확인 전화가 오곤 했다. 그와 동시에 알 수 있었다. 마유즈미가 드디어 선물을 고른 게 분명했다. 아카시는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인터넷 결제라면 지금 제 애인이….”

<오프라인 매장에서 결제하신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안내해드릴까요?>

“…오프라인?”


나가서 사용한 걸까? 아카시는 멀뚱히 사무실 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요?”

<아카시 세이쥬로님의 자택과 멀지 않는 지역입니다>


이케부쿠로 같은 곳이 아니라? 혹여 다른 사람이 쓴 게 아닐까 잠시 의심했지만 그럴 일 없었다. 마유즈미가 쉬는 날이면 항상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취미용품을 사고 들고 오는 날에는 회사에서 퇴근하는 길 뿐이었다.


“…결제 내역 확인 부탁드립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안내원은 1분도 지나지 않아 수화기 너머로 정직하게 말했다.


<○○○ 마트에서 사용하셨으며 총 금액은……>


…마유즈미와 함께 들리는 곳이었다. 그곳은 마유즈미가 취미를 즐기는 용품 어느 것도 팔지 않았다. 그저 채소나 야채, 과자 따위를 파는 평범한 마트였다. 거기서 무엇을 샀다고? 분명 물품을 한꺼번에 계산했기 때문에 자세한 품목은 알 수 없었다. 아카시는 당황한 눈으로 괜스레 서류를 뒤적이다 입을 열었다.


“…분명….”

<아, 그리고 방금 전에>


아카시가 말하려던 찰나 안내원이 남은 내역을 하나 더 불러주었다.


<주류 매장에서 와인 한 병 구매했습니다. 품목 불러드릴까요?>

“……아뇨.”


귀에 대고 있는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아카시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일이 생긴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치자 아카시는 화면에 뜬 메시지를 읽었다.


‘오늘 일찍 들어와.’

“…후우.”


아카시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다가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오늘따라 붙잡는 직원들을 뿌리치고 퇴근한 아카시는 집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그러자 현관에서부터 풍기는 향긋한 냄새에 아카시가 말했다.


“저 왔어요.”

“어어, 마침 잘 왔다.”


얼른 와. 마유즈미의 재촉에 아카시는 코트를 소파에 던지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인덕션 앞에 심각하게 서 있는 마유즈미가 있었다. 앞치마를 둘러맨 그는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익어가는 납작한 고깃덩이를 한참 노려보고 있었다. 마유즈미? 아카시가 조용히 부르자 마유즈미는 허공을 손짓했다.


“접시 좀 꺼내줘.”

“…그거 시키려고 부른 거예요?”

“바빠.”


그 말에 아카시는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고 소매를 걷었다. 찬장에 있는 접시를 꺼내 건네주자 마유즈미는 받아들고 다시 한 번 명령했다. 식기랑 와인 잔 꺼내서 식탁에 놔. 아카시는 그가 말하는 대로 순순히 꺼내놓은 뒤 냉장고를 열었다. 마유즈미는 접시에 감자샐러드를 올리다가 무심코 돌린 시선에 익숙한 걸 보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와인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까 저한테 전화 왔어요.”

“전화? …아아.”


마유즈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인덕션의 작동을 멈췄다. 지글지글 소리가 멈추지 않는 고기 두 덩이가 각 접시에 놓였다. 제법 우아하게 들어 올려 웨이터처럼 식탁에 내려놓자 와인 병을 막고 있던 코르크마개가 열렸다. 아카시는 병을 한 번 흔든 뒤 매끄러운 동작으로 유리잔을 채웠다.


“향 좋네요.”

“추천 받았어.”


스테이크랑 먹기 딱 좋다고 하더라. 마유즈미가 앞치마를 벗자 아카시는 말쑥한 차림인 걸 눈치 챘다. 평소처럼 늘어진 티셔츠가 아니라 깃이 반듯하게 선 셔츠와 말끔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디 나가냐는 질문을 하기 전 마유즈미는 아카시의 어깨를 두들기며 앞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그의 말에 순순히 앉으려던 아카시는 지나간 주제를 다시 꺼내 질문했다.


“사고 싶은 거 다 산건가요?”

“응. 제법 비싸게 샀지.”

“비싸다고요?”


어처구니없는 반응에 마유즈미가 되레 짜증스레 반응했다.


“이래봬도 1등급에 플러스 붙은 안심이야. 고민하다가 산거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안 먹어?”


아카시는 상에 차려진 요리를 보고 웃었다. 먹어야죠, 누가 차린 건데. 의자를 당겨 앉은 아카시를 보며 마유즈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주보고 앉아 있으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묘했다. 아카시는 이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그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어째서요?”


아무런 설명 하나 붙지 않는 의문에도 마유즈미는 알아들은 듯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반쯤 익은 스테이크에서 아카시의 얼굴을 살펴보던 그는 천천히 혀를 굴렸다.


“정작 사고 싶은 건….”


마유즈미는 평소와 같은 말투로 지나가듯 말했다.


“값을 매길 수가 없어서.”


사고 싶은 건 많았다. 항상 우선순위를 두고 사기 때문에 그 아래 순위에 든 물건들은 있었다. 하지만 옥션 사이트를 쭉 둘러보던 마유즈미는 노트북을 덮고 일어섰다. 그리고 카드에 새겨진 제 애인의 이름을 엄지로 쓸며 생각했다. 전국에서, 심지어 세계에서도 몇 없는 카드를 들고 살 수 있는 게 딱 하나라면 스스로 무엇을 고를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 어떠한 규칙이나 법에 신경 쓰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남의 돈으로 남을 사는 꼴이 되겠지만 말이다. 마유즈미는 그저 웃고 나갈 채비를 준비했다.


그는 영원히 전시될 물건이 아닌 연인과 함께 할 수 있는 잠깐의 시간을 사기로 했다. 언젠가 구매할 수 없는 그 날을 앞당겨서 실천했다.


“그래서 항상 하던 대로 오늘을 할부했어.”


조금 더 값을 쳐서. 아카시는 안심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는 마유즈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유즈미는 한 조각 더 먹으려다 말고 멍청하게 앉아만 있는 아카시에게 내밀었다. 자. 그러자 순순히 벌어진 입으로 육즙이 줄줄 흐르는 고기 한 점이 들어갔다. 아카시는 우물우물 씹고 잔을 들다가 생뚱맞은 소리를 뱉었다.


“…그럼 지금부터 즐겨야겠네, 치히로.”

“말해두겠는데, 밤에 뭘 어쩌고저쩌고 하겠다 말하면 각방 쓸 줄 알아.”


부르는 호칭이 바뀌자, 마유즈미는 툴툴대면서 아카시가 들고 있는 잔에 제 잔을 부딪쳤다.



* * *


동거하는 아카시와 마유즈미의 일상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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