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먹] 여행




덜컹거리는 기차 창문 풍경이 계속해 바뀌었다. 산에 뚫린 터널을 지난 기차는 정해진 철로에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몇 번이고 터널로 들어가 어둠에 잠기고 빠져나가길 반복할 때, 움직이던 기차가 천천히 멈췄다. 창가에 앉아있던 아카시가 일어섰다. 올려둔 짐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고 걷자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기차에서 내린 그는 계단을 오르고 내리며 역을 빠져나갔다. 몇몇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다 떠나갈 즘에야 우두커니 서 있던 아카시가 긴 숨을 내쉬었다. 마치 긴장한 것처럼. 제 품을 뒤적이던 그는 네모난 다이어리 하나를 꺼냈다. 벗겨진 가죽 표지를 넘기자 잉크 자국이 나 있는 페이지가 보였다. 맨 앞장에는 숫자와 함께 지역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몇 개의 단어는 그 위에 직선이 쭉 그어져 있었다. 아카시는 몸 돌려 역 이름을 확인했다. 품에 다시 손을 넣은 그는 만년필을 꺼냈다. 섬세한 펜촉이 종이에 닿았다.


아카시는 걷기 시작했다. 그 누구나 말하듯 흔한 시골 풍경이었다. 나름대로 사람 다니는 길라고 보도블록이 깔려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흙길이 나왔다. 도르르 잘 굴러가던 바퀴가 돌에 걸려 덜컹이기 시작했다. 누가 사는지 알 수 없는 집들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폐허부터 시작해 아주머니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집도 있었다. 아카시는 계속해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아무 말 없이 걷던 그가 다시 멈춘 것은 갈림길이 보일 때였다.


앞장만 보던 다이어리가 팔랑 넘어갔다. 몇 장을 넘긴 끝에 펜으로 찍찍 그은 약도가 나왔다. 아카시는 약도와 이 길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이곳이 맞았다. 손끝으로 종이를 더듬던 아카시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야 하는 걸 알았다. 다이어리를 덮은 아카시는 오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곳은 절벽에 가까워지는 길이었다. 절벽이라, 그는 제법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참 올라가고 있으니 우거진 나무 사이로 길이 보였다. 따가운 햇볕에 눈살을 찌푸리던 아카시는 목적지에 다다른 걸 깨닫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공기가 아주 좋았다.


절벽 끝에 올라 선 아카시는 멋진 광경에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바다가 너무나도 근사했다. 거기다가 어렴풋이 보이는 섬과 배까지 아주 잘 어울렸다. 마유즈미가 어째서 이곳을 오고 싶어 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를 곳까지 찾아보면서까지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저 멀리멀리 말이다.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새삼 새로운 점을 알게 되었다. 마유즈미의 또 다른 면을 보게 된 것이다.


“치히로랑 같이 보고 싶었는데.”


아카시의 목소리는 처연하고 가여웠다. 너무나도 슬펐다. 마유즈미를 떠올리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아카시는 제 가슴을 쥐어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절벽에 서 있으니 차디찬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그의 복장은 얇았지만 개의치 않아보였다. 분명 마유즈미도 제대로 옷을 입지 않고 왔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카시의 마음이 한결 더 뜨거워졌다. 함께 있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리 벅찰 수 있다니. 마유즈미와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왜 진작 사귀지 않았던 걸까? 졸업을 앞두고 난 뒤에야 제 마음을 재확인했던 걸까? 그러나 아카시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마유즈미는 이미 제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뒤늦게라도 깨달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카시는 옅은 미소를 띠우며 돌아섰다.


마유즈미는 아카시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말을 했었다. 그래, 졸업식까진 조용히 있고 싶었다. 아카시는 그것에 동의했다. 겨울바람이 불던 은퇴식 날에 마유즈미는 구태여 쫓아오는 농구부 주장에게 몇 마디를 더 흘렸다. 마지막이라며 이것저것 물어본 아카시 때문이었다.


‘어느 대학으로 가실 건가요?’

‘나 대학 안 가.’


그 말에 아카시가 놀라 되물었다


‘시험도 치르지 않았어요?’

‘아아, 그렇긴 한데.’


이때까지만 해도 아카시는 그저 선배의 진로에 대해 궁금한 후배에 불과했다.


‘성적이 좋지 않아서.’


다음으로 아카시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여행을 가려고.’

‘…여행이요?’


그 때도 마유즈미는 몰랐다. 응, 여행. 아카시의 얼굴을 보지 못한 마유즈미는 계속 걸으면서 말했다.


‘1년 정도 돌아다닐 예정이거든. 그래서 교토에 있지 않을 거야.’

‘…어디로 가실 건가요?’

‘잘 모르겠어. 여기저기 정해뒀거든.’


그리고 마유즈미는 뒤돌아 그를 보며 말했다.


‘반 애들이 가자고도 했는데, 아직 모르겠다.’


본관에서 종이 울렸다. 수업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마유즈미는 고개를 들고 건물을 보았다.


‘들어가야겠네. 너도 얼른 들어가.’

‘……네.’


그때서야 아카시는 깨달을 수 있었다. 마유즈미와 함께 하고 싶다. 그가 졸업한 뒤에도.


절벽으로 내려온 아카시는 약도에 따라 해변으로 갔다. 모래사장을 적시는 파도를 보던 아카시는 해변을 걸으며 조약돌과 조개들을 주웠다. 같이 오지 못했으니 이렇게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이곳에 와서 보았던 모든 것을. 아카시는 가방을 열어 주운 것들을 넣어두었다. 물끄러미 안을 들여다보던 아카시는 방금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기념품이라….”


이런 곳에 있을 리 없겠지. 그렇다면 바다를 연상시키는 물건을 사가자. 아카시는 마유즈미에게 선물할 생각에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넘실거리는 바다를 한참동안 보던 그는 몸을 돌렸다. 금세 마음이 허해졌다. 아카시는 마유즈미를 다시 떠올렸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자 고개가 저절로 위아래 움직였다. 지금 올라가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마유즈미가 화를 낼 것이다. 즐거워진 아카시는 돌아가기 위해 해변을 빠져나왔다. 모래가 달라붙은 캐리어 바퀴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올라가는 길에 잠깐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카시는 눈을 비비며 레버를 밀어 의자를 당겼다. 뒤로 젖혀있던 의자가 세로로 고정되자 느릿하게 일어났다.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하지만 분명 좋은 꿈이었을 것이다. 바람이 부는 옥상에 마유즈미가 있었다. 제 연인은 말없이 웃고 있던 것 같다. 아니, 울고 있었던 걸까? 분명 중요한 장면이었는데 방송 때문에 깬 지라 그 기억만 날아갔다. 상관없었다. 조금만 있으면 마유즈미를 만날 수 있었다.


택시를 타고 돌아온 아카시는 주택가 입구에서 내렸다. 모래가 거의 떨어져 나갔는지 바퀴는 다시 조용히 굴러갔다. 길을 걷던 그는 제법 큰 주택 앞에 도착했다. 불이 켜져 있다. 당연했다. 자신이 불을 켜고 나왔으니까. 아카시는 도어락 버튼을 눌러 현관으로 들어갔다.


“나 왔어, 치히로.”


아카시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조명에 번쩍이는 거실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기지개를 피면서 베란다로 갔다. 커튼을 친 그는 거실 불을 끄고 방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켜진 불을 끄고 나왔다. 주방을 지나 복도 끝으로 가자 계단이 있었다. 아카시는 현관으로 다시 가 세워둔 가방을 열었다. 해변에서 주운 조약돌과 조개, 그리고 오는 길에 사온 보틀 쉽을 꺼냈다.


“치히로, 자?”


아까보다 큰 목소리로 외친 아카시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2층으로 올라온 아카시는 또다시 방 하나하나 들어가 불을 끄고 나왔다.


“치히로?”


아카시는 둥그런 창문이 있는 복도 끝에 섰다. 고개를 돌리자 굳게 닫힌 문 하나가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제 가슴을 몇 번 두들긴 후 문손잡이를 잡았다. 소리 없이 연 아카시는 밝은 시야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침과 변한 것이 없었다. 벽 한 쪽에 세워진 책장, 그 옆에 나란히 놓인 장식장, 책상과 침대, 그리고 족쇄에 묶인 마유즈미까지 전부 그대로였다.


마유즈미는 침대 위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카시와 마주하자 미간이 구겨졌다. 아카시는 등을 구부리고 있는 제 연인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왔다.


“배고팠지? 밥은 금방 준비할게.”


그래도 전보단 빨리 왔어, 치히로 생각나서. 아카시는 평온하게 말하며 들고 있는 물건들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퀭한 시선이 보틀 쉽에 닿았다. 어두운 얼굴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마유즈미는 힘없이 팔을 움직였다.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마유즈미는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조소했다. 장식장 공간을 비우던 아카시는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내가 사온 걸 보면 알겠지? 오늘은 바다를 보고 왔어.”

“신고하지 않을 테니까….”

“멋지던데. 치히로가 왜 가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었어.”

“……제발 날 놔줘.”

“나와 함께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카시는 몸을 돌려 마유즈미를 보았다.


“저번에 내 품을 떠나려 했으니 어쩔 수 없어. 치히로는 소중하니까.”


어지럽힌 침대와 바닥을 보고 있음에도 아카시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마유즈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미칠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것이 마유즈미를 더욱 더 미치게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더 이상 만나지 못할 거라는 말 한 마디였을까? 그거 하나가지고?


은퇴식 이후 아카시와 말을 섞지 않게 되었다. 말을 잘 듣는 후배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착각인 것을 알았다. 친구들보다 먼저 떠난다고 했던 그 날, 마유즈미는 기차역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뜨니 이곳이었다. 처음에는 침대만 놓은 방이었다. 마유즈미는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던 일이 펼쳐진 것에 놀랐다. 그 상대가 아카시라는 것에 더더욱 말이다. 아카시는 언제부터 마유즈미를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까? 마유즈미의 입장에서 알 수 없었다. 아카시가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할지라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이곳은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이었다.


“나와 함께 하지 않고 갈 정도로 얼마나 멋진 곳인지 생각했어.”


아카시는 말했다.


“하지만 아직도 모르겠어. 치히로와 함께 간다면 내 생각이 달라질까?”


그러나 마유즈미는 알 수 있었다. 아카시는 절대 자신을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카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악마의 속삭임처럼 마유즈미를 유혹했다. 그 무엇에?


“나는 앞으로도 당신과 함께 여행할 거야.”


치히로가 사랑과 자유를 깨닫기까지.


마유즈미의 눈 위로 어느 때보다 환히 웃고 있는 절대자가 보였다. 아카시는 다이어리 맨 앞장에 있는 여행지 목록을 손으로 훑었다. 그리고 아직 긋지 않은 지역 이름을 하나하나 읊었다. 마치 성경을 읽는 신자와 같았다. 누가 봐도 신실하고 성스러운 자태를 뽐낸 아카시는 마유즈미의 뺨을 만지며 속삭였다.


“마지막 목적지까지 도달하게 된다면.”


치히로는 나를 바라봐줄까? 



* * *


#적먹_전력_60분

5.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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