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먹] 여전히




졸업식 때 너에게 들은 말은 딱 한 마디였다.


‘졸업 축하드립니다, 마유즈미 선배.’


네가 나에게 보이는 눈빛이 예전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 나는 거기서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고맙다는 인사뿐이었다. 손수 건네는 꽃 한 송이에 진한 향이 피어올랐다. 툭툭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덜렁거리는 꽃잎을 보던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너는 이미 그 자리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를 본 것은 강당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걸 누군가에게-심지어 인터넷 상에서도-말하기에는 스스로 의심했다. 소설 속에 나오는 것처럼 불타는 마음을 가지지도 않았고, 손을 잡고 싶다든가 같은 걸 바라지 않았다. 너와 대면한 것은 오로지 본교 강당 혹은 경기장 그 뿐이었다. 너는 나를 바라볼 때마다 그저 경기에 쓰일 매개체로 바라봤다. 그것은 컴퓨터 본체에 들어가는 RAM카드를 보는 것과 비슷했다. 내가 항상 조립할 때 보는 시선이었다. 얼마나 쓰임새가 있느냐 없느냐, 나는 너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계속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로맨스라고 읊는 시 문구를 떠올리게 했다. 어느 순간 눈길에 닿는 게 너밖에 남지 않았더라, 그것은 지나간 봄을 잡는 것처럼. 1년 동안, 어쩌면 그 전부터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너는 바람으로 시작해 돌풍이 된 게 아닐까. 그리고 태풍처럼 커진 이 감정은 소리 없이 계속 돌고 도는 게 아닐까.


네 빈자리가 너무 커서 거기를 덮을 사람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그 자리로 돌아왔을 때 같이 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너 뿐이었다. 나에게 너는 그런 존재였다.


그리움에 사무칠 때 스쳐 지나가는 너를 발견했다. 실로 몇 년 만이었다. 교토에서 대학을 진학했지만 나는 라쿠잔 고교 앞으로 지나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 결과 성공적이었지만, 보상으로 사무치는 그리움을 받았다. 비슷한 사람만 보면 너를 쫓아, 흔히 닮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몇 번이고 사귀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잊지 못했다.

 

흔히 말한다. 만남은 예기치 않을 때 이뤄진다. 오늘의 나는 밤새 과제를 하는 통해 부스스한 머리를 모자로 꾹 눌러쓰고, 반달처럼 그을린 기미를 가리기 위해 안경을 썼다. 구겨진 셔츠와 바지, 그리고 낡은 운동화를 신고 나온 날 너를 발견했다. 이건 정말이지 신의 장난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너를 붙잡는다면 어떤 반응이 올까? 비웃을까? 한심해할까? 아니면…. 더 많은 판단을 하기 전 나는 몸을 돌려 너를 붙잡았다. 등을 보이던 네가 뒤돌아 나와 마주했다. 순간, 네 눈에서 쏟아지는 낯선 시선에 나는 더 마주볼 수 없었다.


잊었구나. 나는 그 자리에서 즉시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네가 더 말을 걸기 전 급하게 말했다.


“아는 사람과 닮아서요.”


입 다물기 무섭게 내 갈 길을 찾았다. 딱딱한 보도블록을 밟으며 걷고 나니 모르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환하게 비치는 태양 아래서 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 도달했다. 그리고 나는 울었다. 눈물이 나지 않았지만 울었다.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문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고개를 돌자 아까 부딪친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소리 없이 사라진 그는 마치 봄의 아지랑이와 같았고, 여름의 흐트러진 신기루가 떠올렸고, 가을의 바스러지는 낙엽을 넘어섰다. 그리고 봄이 오기 전 녹아내린 눈 자체였다. 사계절 어느 때이든 해가 기우면서 만날 수 있는 흐릿한 형체, 그림자와 닮았다. 아니, 그림자는 아니었다. 조금 더 달랐다. 그것은….


행여 누가 붙잡을까봐 황급히 뛰기 시작했다. 어디로 갔는지 바로 찾지 못했지만, 찾아야만 했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나의 그림자가 아닌 ‘그늘’이었다.


처음 강렬한 태양빛 아래 만났던 그는 너무나도 자유로워서 내가 눈에 담고 있음에도 금방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억지로 조여들었다. 어떻게든 내 시야 밖으로 벗어나지 않길 바라면서. 이것은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것이었다. 중학교 때는 찾지 못했던 유일무이한 그늘이었다. 살아있다면 그 무엇이든 뜨거운 빛에 계속 노출되는 것을 꺼릴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찾는 것은 빛 아래 숨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에게 그는 그런 휴식처였다.


어떻게 바라봤는지 지금 떠올려보라 한다면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승리를 갈구해야 했기 때문에, 그를 이용한 것은 맞았다. 경기 도중에도 그를 내쳤고, 그를 산산조각 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같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깨우쳤다. 그가 없었다면 나는 이곳에 남아있을 수 있을까, 나를 되찾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이제 내 곁에 없었으니까.


경기가 끝난 후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 그것으로 만족했을까? 조금의 욕심으로 꽃을 전해준 것은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걸까? 졸업 이후 더 보이지 않는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던 것은 그늘 그 자리를 그대로 놔두는 것이었다. 영원히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자리 5번을 남겨두고 나는 그리움을 삼켰다.


이 마음을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랑? 아니면 연민? 그것도 아니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감정을 표현할 단어 하나 찾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모자른 퍼즐 조각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됐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흔적을 쫓을 수 있었다. 미련 남은 흐릿한 그늘 발자국을 따라가자 골목길에 그가 서 있었다. 턱 막히는 숨을 고르고 내쉴 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흐릿한 눈동자 위로 묽어진 내가 비춰졌다. 눈이 마주치자 심해보다 더 깊은 어딘가에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눈에 띄게 느려진 손을 들었다 내리면서 그를 소리 없이 불러보았다.


“아.”


순간 터져 나오는 탄식에 나는 더 참지 못하고 팔을 뻗었다.



네가 달려들자 나는 더 피하지 못했다. 운석이 충돌한 것처럼 너와 내가 부딪쳤다.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며 행여나 놓칠세라 꽈악 끌어안는 너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여전히 날이 선 눈이었다. 하지만 품에 안긴 너는 전보다 따뜻했다. 코 끝에 풍기는 익숙한 샴푸 냄새에 향수병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여전히.”


나는 말했다.


“키는 그대로네.”


사실은 조금 더 컸다. 너도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축축이 젖어가는 내 어깨가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떨리는 손을 겨우겨우 든 나는 너를 안았다. 있는 힘껏.


내가 느끼는 감정을 해석할 시간이 찾아왔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결과가 나온다면 나는 웃을 것이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 *


몇 년 뒤 마유즈미와 아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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