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먹] 편지 봉투 안에는
졸업 전까지 말을 걸지 못한다면 편지는 어떠냐고 물었다. 종이 쪼가리에 무슨 의미가 있냐 묻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필담으로 물어봤기에 마유즈미는 그러라고 서툴게 말했다. 그 뒤에 일주일에 두세 번 신발장 안에는 화려한 무늬의 편지가 놓여있었다. 마유즈미는 밀랍으로 굳힌 동그란 자국을 보면서 일부러 구겼다. 이것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와 같았다. 열어보는 순간 뜻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일 게 분명했다. 마유즈미는 세상의 평화를 원했다. 장하지 않아도 매번 있는 편지를 열어보지 않은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쌓인 편지는 다양한 색상과 무늬로 가득했다. 서랍을 가득 채울 정도로 양이 불어나자 잠시 고민했다. 그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 열어보지도,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하는 편지 뭉치를 보고 있으니 어느새 봄내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날이 되었다. 꽃봉오리가 진 나무 아래 마유즈미는 꽁꽁 묶은 뭉치를 들고 나왔다. 못 읽었어. 솔직한 첫 인사에도 아카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가요. 덤덤하게 넘기는 녀석이 순간 괘씸해 못되게 말했다. 내가 읽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그러자 아카시는 들고 있는 뭉치 틈 사이로 편지 하나를 꺼냈다. 뭐하냐는 말이 나오기 전에 봉투가 뜯겼다. 너덜너덜 붙은 밀랍 도장 사이로 편지지가 빠져나왔다. 그 자리에 서 있는 마유즈미를 향해 아카시는 종이를 들이댔다. 은색 실을 수놓은 것 같은 화려한 편지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카시는 말했다. 이 순간을 위해. 이 순간을 위해? 그러자 아카시가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이렇게 한다면 당신은 분명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테니까. 그리고 아카시는 말했다. 또 보내도 될까요?
* * *
성실한 아카시에게 치인 마유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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