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먹] Halloween
불현 듯 진실을 알게 된 때는 할로윈 어느 날 아침이었다.
평소처럼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하던 마유즈미는 울렁거리는 속을 좀처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어젯밤 꿨던 꿈 때문일 것이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 꿈은 참으로 이상했다. 마유즈미는 꿈에서 아카시를 만났다. 흔히 있는 일상이라 여겼다. 가로수가 세워진 길을 걷던 와중 아카시는 달빛 아래 서서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던 찰나, 마유즈미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아카시의 발밑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당연한 사실임에도 마유즈미는 그곳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호수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일렁이던 그림자 표면은 겹쳐져 있었다. 한 사람에게 두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깨닫는 순간 꿈에서 깼다. 천장을 멍청히 보던 마유즈미는 얼굴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마유즈미 선배.”
아카시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광장에서 만나기로 한 주말, 교복을 벗으면 그보다 더 어리게 보이는 소년은 느리게 걸어온 제 연인을 맞이했다. 조금 으스스한 날씨에 몸을 떨자 아카시는 광장 너머를 가리켰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는 종종 가는 카페가 보였다. 유리창이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목재 인테리어로 장식된 풍경에 녹아들며, 마유즈미는 아카시가 주문한 커피를 받아들었다. 라쿠잔 고교 2학년으로 올라간 아카시는 여전했다. 농구부 활동에 여념하고 있었으며, 인터하이는 가뿐히 우승한 뒤였다. 잔에 담긴 온기가 하얗게 올라오는 모습을 보던 마유즈미가 물었다.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아?”
윈터컵에 대한 질문이었다. 아카시는 커피 잔을 식힌 뒤 한 모금 삼켰다.
“제가 질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뭐, 딱히.”
마유즈미는 제 턱을 만지다가 말했다.
“하지만 작년에는 졌잖아.”
“마유즈미 선배가 포지션을 지키지 못했었죠.”
“내 탓이라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아카시는 낮게 웃으며 다시 잔을 들었다. 마유즈미는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앉은 두 사람은 투명한 유리 표면 위에서 춤을 추듯 흔들리고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오고가며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호박 머리를 쓰거나 유령 보자기를 뒤집어쓴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고 있어?”
“네?”
아카시는 마유즈미의 시선에 따라 밖을 보았다.
“할로윈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
“그러고 보니 오늘 피규어 한정판을 판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미 갔다 왔지. 너 만나려고.”
마유즈미는 설렁설렁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아카시가 말하는 할로윈 한정판 피규어는 도쿄로 올라가야 살 수 있는데, 오늘 약속으로 포기했다. 도쿄에 갔더라면 늦은 밤에 만났어야 했다. 그렇게까지 살 정도는 아니었다. 스스로 변명이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며 다시 아카시를 보았다. 소년은 아까보다 좀 더 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연기처럼 흘러나오는 잔을 보던 마유즈미는 다시 창가를 내다보았다.
아침에 이상한 꿈을 꿨다고 말하지 못한 이유는 단순했다. 마유즈미는 알고 있었다. 졸업한 뒤에 아카시를 다시 만나고, 어쩌다보니 연애를 시작하고, 드문드문 꾸준히 만나면서 깨닫고 있었다. 고교 3학년 내내 만났던 아카시와 지금의 아카시는 차이가 있었다. 호칭도 호칭이지만,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그럼에도 헤어지지 않은 이유 또한 단순했다. 아카시를 좋아하니까. 흔히 소설에서 나오는 구절처럼, 형태가 변하든 간에 존재 자체를 좋아한다면 그 무엇이 변하든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건 정말 책에서만 나오는 허구라 믿어왔는데. 마유즈미는 빈 잔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들었다.
“여기 한 잔 더요.”
헤어지기 전 아카시는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슬쩍 열어보니 선물 꾸러미였다.
“오늘 무슨 기념일이야?”
“할로윈 데이잖아요.”
“…나는 아무것도 없는데.”
마유즈미는 괜찮다고 말하는 아카시를 데리고 편의점에 갔다. 수중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 사탕이며 초콜릿을 전부 사고 나니 조금 나았다. 간식이 잔뜩 담긴 하얀 봉지를 안겨주자 아카시가 웃었다.
“잘 먹을게요.”
“나도.”
그렇다면 정말 꿈대로 아카시는 두 명일까? 마유즈미는 집으로 돌아가는 아카시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거리 끝으로 사라진 소년의 뒷모습을 덧그리며 몸을 돌렸다. 묻는다면 대답하겠지. 아카시는 숨기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아카시와 함께 했던 기적의 세대는 정확히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기필코 알아야 할 사항은 아니었다. 그래야 했다면 아카시가 먼저 말했을 것이다. 마유즈미는 가로등이 켜진 아래로 가 쇼핑백을 슬쩍 열어보았다. 반질반질 빛나는 포장지에 감싼 상자였다. 딱 봐도 초콜릿이 가득 들어있어보였다. 마유즈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다시 걸었다.
집에 들어오자 마유즈미는 외투를 벗고 책상에 앉았다. 포장지를 뜯고 상자를 개봉하자 달달한 향이 올라왔다. 그는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초콜릿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안쪽에는 초콜릿을 녹였는지 액체가 흘러들어왔다. 두어 개 주워 먹고 나니 입안에는 초콜릿 향이 떠나지 않았다. 마유즈미는 상자를 접고 한쪽으로 밀어뒀다. 기지개를 쭉 피고 나니 할로윈이 끝날 때가 되었다. 그는 씻기 일어섰다. 일찍 자야겠군.
달을 가린 구름이 사라졌다. 그러나 달빛이 쏟아지지 않았다. 눈을 감고 떴을 때 아직 밤이었다. 아니, 새벽일까? 마유즈미는 자명종 시계를 찾으려 상체를 일으켰다. 이상하게도 몸이 으스스했다. 창문을 열고 잤을 리 없을 텐데. 미간을 찌푸리며 창문 쪽을 보는 순간 놀라움에 눈이 커졌다. 창문틀에 발을 딛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동그랗게 뜬 달을 가리고 있는 인영에 마유즈미는 눈을 비비면서 일어섰다. 처음 볼 때부터 알았다.
“아카시.”
창문에서 떨어지지 않은 남자는 아카시였다. 숨은 취미라도 되는지 흡혈귀처럼 까만 옷을 입고 있었다. 바람 따라서 펄럭이는 검은 망토는 밤하늘과 닮아있었다. 가늘게 뜨고 있는 눈 위로 이유 모를 붉은 광채가 스쳐 지나갔다.
“치히로(ちひろ).”
그리고 익숙한 호칭이 들렸다. 마유즈미는 제 뺨을 꼬집으려다가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움으로 빚은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의 아카시를 만나면서 허한 마음이 가득 차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과는 달랐다. 마치 숨겨놓았던 비밀의 방을 연 것처럼 간질거리며 올라오는 벅찬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다. 긴장이라도 한 것처럼 울렁거림이 끊이지 않는다. 마유즈미는 그늘에 가려진 아카시를 보다가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그러자 아카시는 웃었다. 지금과 다른 웃음이었다.
“이렇게 만나니 마치 죽은 사람과 조우하는 것 같네.”
“아니.”
아카시는 손을 뻗어 마유즈미의 가슴을 두들겼다.
“항상 곁에 있었어.”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는 잘도 하는군.”
“담아둔 진실을 숨기기엔 시간이 너무 짧아.”
마유즈미는 다시 시계를 찾았다. 밤 12시가 되기 전이었다. 턱없이 짧은 시간에 마유즈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낮에 물어보고 싶었는데.”
“무엇을?”
“네가 말하는 진실을.”
“왜 묻지 않았지, 치히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금붕어처럼 뻐끔대던 입을 간신히 움직였다.
“아니라고 한다면…네 존재를 부정당할까봐.”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이 또한 꿈인지 상상인지, 현실이라고 애써 짚지 않지.”
“잘 아네.”
“오랫동안 봐왔으니까.”
마유즈미는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래봤자 1년도 안됐어.”
“1년 넘었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어째서?”
아카시는 흥미로운 눈으로 제 연인을 보았다. 마유즈미는 온갖 치부를 다 드러내는 기분이었다. 침대에서 헐벗을 때도 이렇게 부끄럽지 않았다. 흔히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딱히 숨기거나 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모두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속내를 털어내는 일은 굉장히 힘들었다. 마유즈미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가짜라면 더 실망할 테니까.”
그 말에 아카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창문에서 떨어져 마유즈미 곁으로 다가갔다. 느릿하지만 애틋한 손길이 뺨에 닿았다. 차갑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뜨겁지도 않았다. 턱을 잡는 손을 느낀 마유즈미는 스스로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언제 볼 수 있어?”
“조만간.”
아카시의 말에 그는 체념했다.
“악몽(惡夢)이군.”
“길몽(吉夢)이라 여겨줘.”
가벼운 키스였지만 온몸에 돌고 있는 피 일부가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부드럽게 감싸고 떨어진 아카시는 혀를 굴려 소리 냈다. 똑, 딱, 똑, 딱. 그리고 망토자락을 잡으며 몸을 돌린 흡혈귀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밤 12시, 할로윈의 밤이 끝났다.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마유즈미는 몸을 떨며 일어났다. 창문은 닫혀있었다. 잠금고리까지 철저하게 잠긴 모습을 본 그는 느릿하게 일어났다. 창문을 열자 세한 바람이 들어왔다. 곧 있으면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마유즈미는 선명하게 기억하는 꿈을 다시 한 번 더듬으며 혼자 웃고 말았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악몽일까, 아니면 길몽일까? 다시 한 번 만나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
할로윈 적먹